폐암 치료제 '크리조티닙' 임상시험 환자 87% 병세 호전
폐암 치료제 '크리조티닙' 임상시험 환자 87% 병세 호전
- 입력 : 2010.07.13 03:16 / 수정 : 2010.07.13 05:16
획기적 '폐암(非소세포암) 킬러'?…
한국이 임상시험 주도
전체 폐암의 5~10% 차지, 유전자 변이 암에 효과
외국 환자들도 지원 몰려… 국내병원들 위상 높아져
대전에서 은행원을 하는 장선익(45)씨는 지금 인생을 덤으로 사는 기분이다. 3개월 전 폐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았던 그가 매일 아침·저녁 약을 두 번 복용하는 것만으로 일상생활을 활기차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는 지난해 7월 기침 증세가 있어 감기로 생각하고 병원을 찾았다가 폐암 진단을 받았다. 담배를 한 번도 피우지 않았고 나이도 젊은데 폐암이라니…. 암은 이미 척추로도 전이돼 있었다. 말기 상태였다.
이후 고난의 항암치료를 견디었지만 잠시 크기가 줄던 폐암은 몇 개월 후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극도의 두통과 구토, 어지럼증도 몰려왔다. 암이 뇌로도 퍼진 것이다. 병원에서는 이제 쓸 항암제가 없다고 했다. 부인과 고1·중1 두 딸을 둔 가장(家長)은 하늘을 하염없이 원망했다.
4월 14일, 그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서울대병원 외래 진료실에 들어섰다. 다국적제약회사 화이자가 개발 중인 폐암치료제 '크리조티닙(Crizotinib)' 임상시험을 받기 위해서다. 여기서 희망이 싹텄다. 복용 두 달 만에 오른쪽 폐에 10㎝ 크기로 자리 잡았던 암 덩어리가 1.5㎝로 확 줄어든 것이다. 뇌와 뼈 전이암도 줄면서 두통과 요통도 사라졌다. 장씨는 "아직은 불안하지만 나에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외국서도 지원 환자 몰려
새로운 폐암치료제 '크리조티닙'의 드라마틱한 효과가 전 세계 의료계에 화제를 낳고 있다. 특히 이 신약(新藥)의 임상시험을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방영주(56) 교수가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국내 의학계는 흥분하고 있다. 수년 전 만성백혈병 환자들에게 '기적의 약'으로 등장했던 '글리벡' 같은 약이, 한국 병원의 임상시험으로 탄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 항암치료제 ‘크리조티닙’의 임상 시험을 진행 중인 서울대병원 방영주 교수는 “전 세계 폐암 환자들로부터 임상시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연락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소문은 벌써 외국으로 퍼졌다. 이미 16명의 일본인과 1명의 중국인 폐암 환자가 이 약을 먹기 위해 비행기로 날아와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임상시험 단계에서도 환자들이 국경을 넘는 이례적인 일이 나타난 것이다.
방 교수는 각국의 의사나 환자들로부터 임상시험에 참여할 방법을 묻는 전화와 이메일이 끊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크리조티닙은 폐암의 종류 중 비(非)소세포암 치료제이다. 그중 유전자 검사에서 폐암을 일으키는 '알크(ALK)' 유전자 변이가 있는 환자만 적용 대상이다. 특정 발암(發癌) 유전자를 차단하는 이른바 '타깃(target)' 항암제이다. 대상 환자는 전체 폐암의 5~10%로, 주로 비(非)흡연자이거나 여성들이다.
방 교수는 2008년 말 이 약의 임상시험을 1상(床)부터 맡아달라는 제안을 화이자로부터 받았다. 1상은 약물의 독성 여부를 타진하는 초기 단계로, 장차 신약 개발 성패가 달린 매우 중요한 시험이다. 이 때문에 신약 개발비로 수백~수천억원을 들인 제약회사들은 소수의 나라에서 임상시험 인프라가 잘 갖춰진 병원만을 엄선해 이를 맡긴다.
서울대병원은 지난해 국내에서 이뤄진 400건의 임상시험 중 144건(36%)을 맡은 최다(最多) 수행기관이다. 이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방 교수는 그동안 위암 치료법 개발 등에 성과를 내면서 국제적으로도 저명한 항암제 임상시험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이로써 화이자가 폐암 치료 '블록버스터'(blockbuster·전 세계를 대상으로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것)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크리조티닙 임상시험은 미국과 호주, 한국 등 3개국에만 맡겨졌다.
임상 1상부터 약효가 두드러지면서 그 혜택은 한국인 환자 29명에게 먼저 돌아갔다. 충남 천안에 사는 K모(55·여)씨는 1년4개월째 한 달 한 번 서울에 올라와 이 약을 타 먹고 있다. 2009년 3월 당시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받고도 폐암이 재발해 치료를 포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K씨는 예전에 하던 외판업을 다시 시작할 정도로 건강을 되찾았다. 남편 이상주(58)씨는 "머리도 안 빠지고 구토도 없다"며 "방영주 교수를 업어 주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방 교수는 지난 6월 5일 전 세계 암 전문의 3만여명이 모인 미국 임상종양학회 총회 석상에서 3개국 임상시험기관을 대표해 1상 시험 결과를 발표했다. 기존의 치료법에 효과가 없던 폐암 환자 87%에서 크리조티닙으로 병세가 호전됐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발표는 올해 가장 주목해야 할 연구로 뽑혔다. 미국과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청은 크리조티닙의 치료 효과가 뛰어나자 임상 1상이 마무리되지 않았음에도 가능한 한 많은 환자가 치료 기회를 얻도록 지난 3월 임상 2상과 3상을 열었다. 적용 대상 환자가 늘어난 것이다. 이로써 국내에서는 서울대병원 외에 삼성서울병원과 국립암센터 등도 투약을 시작했다. 현재 국내에서 약 50명의 폐암 환자가 이 이약을 먹고 있다.
◆'임상시험 강국'
신약에 대한 소문은 임상시험 환자들이 인터넷 블로그나 페이스북 등에 글을 올리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개인의 인터넷 네트워크, 즉 소셜 미디어(social media)가 초기 단계의 임상시험 정보를 퍼뜨리는 새로운 현상이다. 방 교수는 "일본·중국·캐나다·호주 환자들이 블로그 등을 보고 문의해 오는 경우가 많다"며 "국내에서 여러 국적의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하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임상시험은 앞으로 1년여 더 진행될 예정이다. 의료계에서는 의약품 승인 허가 요건에 맞는 임상시험 환자를 채우는 속도에 따라서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이 약을 시판하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고려대 의대 종양내과 김열홍 교수는 "약물의 장기적인 부작용이나 효과를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크리조티닙이 국내에서 임상시험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적으로 시행한 최초의 글로벌 신약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건을 계기로 국내 병원들의 임상시험 위상도 한 단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다국적 제약회사의 임상시험 유치는 최초 개발 약물을 자국 내 환자에게 처음 적용할 수 있다는 점과 모든 연구비와 치료비를 제약회사 부담한다는 면에서 외자 유치 효과도 낸다. 이 때문에 각국의 유수한 대학병원들은 신약 임상시험을 유치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국내 의료기관의 다국적 제약회사 임상시험 유치는 2005년 95건에서 2009년에는 202건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방 교수는 "유전자의학의 발달로 타깃 항암제가 쏟아져 나오고 그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상황"이라며 "이제 임상시험이 의료의 국제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 '크리조티닙' 임상시험을 받으려면
―비(非)소세포 유형의 폐암이면서
―기존의 항암 치료가 효과를 보지 못했고
―검사에서 '알크(ALK)' 유전자 변이가 확인된 경우
―서울대병원·삼성서울병원·국립암센터 등의 임상시험 기관에서 받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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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폐암에 획기적인 치료효과를 보이고 있는 항암치료제 '크리조티닙'의 임상시험에 성공을 거두며 세계의약계에 폐암치료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방영주교수가 항암치료제의 임상시험과정과 향후 전망을 밝혔다./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