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공부법
선인들의 공부법에 대한 글을 읽다가
주목할 만한 부분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선비와 여사?
조선시대에는 공부하는 사람들을 ‘선비(士)’라고 불렀다.
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을 말하며 사대부(士大夫)라고 했다.
그렇다면 선비는 남자들만의 전유물인가?
그렇지 않다.
여자들 중에도 학식이 풍부하고 인품이 훌륭한 인물들을
‘여사(여사)’라고 불렀다.
우리가 흔히 ‘김 여사’, ‘이 여사’할 때의 바로 ‘그 여사’다.
(흥미롭네요. 여사의 어원이 이렇게 출발하였군요.)
2. 조선시대?
조선 사대부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은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주희가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성리학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주희를 신성불가침한 성역으로 받들고
주자학을 공부했다.
조선 후기에 와서야 이용후생과 실학사상이 퍼지면서
학문의 영역이 다양화되었다.
예를 숭상하는 성리학은 다분히 교조적이어서 조선에
신분제도를 고착시켰고, 그 결과 평민과 천민에 의한 사회변혁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학문의 영역이 다양화되었다고 하지만 결코 주류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3. 김종직?
그는 (천자문)을 외우고 (동문선습)을 떼고 나자
공부에 재미가 생겼다.
이른바 문리가 트인 것이다.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일이 점점 즐거워졌다.
(무슨 일에서든 문리가 터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4. 이황?
퇴계 이황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고 7개월밖에 되지 않았을 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 이식은 좌찬성을 지낼 정도로
쟁쟁한 학문과 경륜을 가졌으나,
청렴하여 재물을 축적하지 않아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어머니 박씨는 7남 1녀 중에 장남만 출가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홀로 어린 자식들을 보살펴야 했다.
어머니는 일찍 홀몸이 되어 장차 집안을 유지하지 못할까
염려해서 더욱더 농사와 양잠 일에 힘쓰셨다.
여러 아들이 점점 장성하자,
가난한 중에도 학비를 내어 먼 데다 가까운 데나 취학을
시켰다.
5. 이황?
이황의 훗날 손수 쓴 어머니 묘비명의 기록이다.
“사람들은 보통 과부는 자식을 올바로 가르치지 못한다고
흠을 본다. 너희들이 남보다 백배 더 공부에 힘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느냐?
박씨는 항상 자식들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이황은 재롱을 부릴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가르침을 가슴속에 새겼다.
(부모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6. 조식?
“안에서 나를 깨우치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
조식은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이와 같은 글을 새긴 것이다.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 칼로 턱을 고이는가 하면
허리춤에 방울을 차고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여
밤에도 정신을 흐트린 적이 없었다.
한가로이 지낸 세월이 오래되지 사욕과 절개로 악을 미워하며
선량하지 않은 향은 엄격하게 멀리했기
때문에 향인 감히 접근하지 못했으며,
오직 학도들만이 종유하였다.
7.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18세기에 활동하였던 금원 김씨는 기생의 신분.
금원은 기생의 신분을 잘 알았다.
비록 기생 신분이지만 어머니처럼 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모른다.
그는 남자들에게 꺾이기 전에 서책을 통해
만난 넓은 세상을 유람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평생 집 안에만 갇혀 지내는 것은
덧없는 일로 생각했다.
수많은 책에서 읽은 금강산에 꼭 한번 올라가보고 싶었다.
그녀는 부모에게 금강산을 유람하겠다고 졸랐다.
부모는 나이 어린 소녀의 소망을 오랫동안 모른 체하다가.
금원이 음식까지 거부하자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8. 내 삶을 생각하니 금수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다행이요.
야만의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고 문명의 나라에서 태어난 것
또한 행복이다.
남자로 태어나지 않고 여자로 태어난 것이 불행이요,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불행이다. ...
여자로 태어났다고 규방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것이 옳은가.
한미한 집안에 태어났다고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을
단념하고 분수대로 사는 것이 옳은가...
(힘들다고들 하지만 이 시대에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이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출처: 이규방, (공부에 미친 16인의 조선 선비들), 해냄, pp.1-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