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 등에 밀려 한동안 논외이던 일본이 최근 한국 경제의 화두로 떠올랐다. 잘나가고 있어서가 아니다. 한국이 일본식 장기 불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 메시지가 계속 나오면서다. 일본은 1990년대 초반 버블 붕괴 이후 20년 넘게 저성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 무엇보다 국가 부채가 1000조엔을 넘어설 기세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경3000조원에 달한다.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200%를 넘는다.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는 그리스나 이탈리아도 각각 163%, 120% 수준이다. 신용등급은 추락을 거듭했다. 2011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무디스가 일본의 국가 신용등급을 1단계 강등한 데 이어 올해 5월에는 피치가 기존 ‘AA’에서 ‘A+’로 두 단계 내렸다.
세계를 호령하던 일본 기업들의 체면도 말이 아니다. 피치는 최근 세계 2위 철강회사인 신일본제철-스미토모금속의 신용등급을 ‘BBB’로 강등했다. 등급전망도 ‘부정적’으로 바꿨다. ‘전자왕국’의 몰락은 더 뼈아프다. 소니는 7분기 연속 적자에 시달리며 최근 주가가 32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파나소닉은 올 회계연도(2012년 4월~2013년 3월)에 약 7650억엔(한화 10조원)의 적자를 낼 것으로 보인다. 감원에 공장 정리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지만 뚜렷한 묘수가 없어 보인다. 두 회사의 신용등급은 11월 말 정크(투자부적격) 수준으로 떨어졌다.
유니클로의 가파른 성장세와 토요타가 3분기 시장의 기대를 넘어서는 32억 달러(한화 3조4400억원)의 순이익을 낸 것 정도가 그나마 위안거리다. 20세기 세계 경제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던 일본이 어느새 닮아서는 안 될 모델로 바뀐 것이다. 세계 각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 중 하나가 ‘재패니피케이션(Japanification)’, 우리말로 ‘일본화’다.
저성장 시대 돌입은 기정사실
한국 경제는 나름대로 순항하고 있다. 신용등급은 일본과 중국을 앞섰고, 국가 부도위험의 척도인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5년 만기 국채)도 안정적이다. 유럽재정위기 등으로 수출 여건이 악화한 상황이지만 기업들의 실적도 나쁘지 않다. 대표기업인 삼성전자의 주가는 사상 최대 규모의 영업이익을 바탕으로 150만원을 돌파했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잘 버텨왔다는 평가지만 미래가 밝으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No’다. 일단 성장률이 발목을 잡는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12월 10일 대한금융공학회-한국금융연구원 주최 정책심포지엄에 참석해 “그간 누적된 구조적 문제점으로 단기적인 경기 침체가 아닌 장기적인 저성장 추세에 돌입했다는 비관적인 견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최근 한국 경제의 부진은 주로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에 기인하는데 이는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며 “저성장 추세가 세계 경제의 새로운 균형으로 정립될 것이라는 견해가 주목 받고 있다”고 밝혔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한국 경제의 연간 평균 경제성장률은 3.1%에 그쳤다. 올해는 2% 달성도 불안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내년 전망 역시 어둡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내년 한국 경제성장률을 4.0%에서 3.1%로 하향 조정했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이 전망한 평균치는 3.0% 안팎이었다.
국내 연구소들도 비슷하다. 금융연구원은 2.8%, 한국개발연구원(KDI)은 3.1%로 예상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유로존 위기와 미국 재정절벽, 대선 및 경제민주화 공약 등 대내외 리스크가 현실화할 경우 경제성장률이 1.8%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당분간 저성장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는 이견이없어 보인다.
나아가 저성장 추세와 부동산 가격 폭락이 1990년대 일본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이유에서 한국이 일본식 장기 불황의 덫에 빠져들 수 있다는 걱정도 나온다. 일단 지금의 ‘저성장·저금리’ 현상은 경제가 활력을 잃어간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경기 침체기의 낮은 금리는 기업 투자와 내수 회복에 도움을 주지만 현재 상황은 그렇지 않다.
좀처럼 기업 투자가 늘지 않는다. 1990년대 우리나라의 설비투자 증가율은 연평균 9.1%에 달했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3.7%까지 추락했다. 올 3분기에는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7.1%나 떨어졌다. 자본 조달 여건이 좋아졌음에도 기업이 돈을 쓰지 않는다.
어두운 성장전망과 가계부채 탓에 민간 소비도 제자리걸음이다. 부동산 자산가치까지 떨어지면서 침체 속도는 더욱 가팔라졌다. 여기에 저물가와 저환율까지 겹친 ‘4저(低)형 불황’의 모습이다. 표면적으로는 분명히 1990년대 중반 일본의 장기 불황 초입과 유사하다. 물론 한국이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국투자증권은 ‘일본의 길, 한국의 길’이라는 보고서에서 부동산 가격의 흐름, 인구 구성의 변화, 경제성장률 둔화, 저금리 등 몇 가지 유사성이 있지만 1990년대 일본에서 일어났던 ‘자산시장 버블→기업 수익성 악화→부동산 및 주식시장 폭락→저성장의 구조화와 장기화’라는 도식이 한국 경제에 그대로 적용되진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기업에 의해 부동산 버블이 발생한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부동산 가격이 기업 수익에 미치는 영향이 일본에 비해 덜 직접적이라는 이유에서다.
부동산 시장 버블의 정도 역시 차이가 있다. 일본은 1981~1991년 사이 6대 도시의 상업용지 가격이 473% 상승했지만 한국은 189%에 그쳤다.(1998~2008년 사이 서울 아파트가격 기준) 주택산업연구원 김찬호 연구위원은 “2000~2006년 사이 우리나라의 부동산 가격 상승은 호황기에 나타나는 정상적인 범위에서의 상승폭이었으며 일본의 1980년대 말과 같은 비정상적인 구조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안정적인 주식시장 또한 낙관론을 뒷받침한다.
1990년대 중반 일본 주식시장의 주가수익비율(PER)은 50배를 넘었지만 한국은 아직 10배 수준이다. 당분간 성장률이 다소 둔화하겠지만 일본과 같이 급격한 자산시장의 붕괴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란 얘기다. 골드먼삭스 등 다른 회사의 보고서들도 전체적인 톤은 낙관론에 가깝다.
부동산 버블 원인 다르다최근 대니얼 앨트먼 미 뉴욕대 교수는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에 기고한 ‘한국의 기적은 이렇게 끝나는가?(Turning Japanese: Is this the end of the South Korean miracle?)’라는 글에서 “한국이 일본식 장기불황에 근접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도 “한국은 이웃(일본)을 참고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사정이 낫다”고 말했다.
일본의 실수를 되짚어보면 최악의 상황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하지만 최근의 논의를 살펴보면 하나 빠진 게 있다. 한국 경제가 일본식 장기 불황에 빠질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의는 활발하지만 일본식 장기 불황이 현실화할 경우 한국 경제가 과연 버틸 수 있느냐에 대한 분석은 거의 없다.
한 애널리스트는 “일본이 지금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달리 보면 그래도 일본이기 때문에 20년을 버텼다”며 “한국 경제의 현재 체력으로는 10년도 못 버틸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처럼 되진 않을 것’이란 낙관적인 전망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라 가장 나쁜 시나리오를 확인하고 한국 경제의 약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확인해 볼 때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