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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음료시장의 화제는 단연 에너지 음료다. 지난해 식음료 업계가 정부의 가격 인상 억제와 경기 불황으로 어려운 한 해를 보냈지만 에너지 음료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지난해 주요 편의점에서 에너지 음료의 전년 대비 매출 증가율을 보면 GS25가 699%, 세븐일레븐이 455%, CU는 368%에 달했다. 웅진식품 김주한 부장은 “에너지 음료의 성장세를 보면 과거 음료 업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놀라운 속도”라며 “1990년대 후반 ‘매실 열풍’ 이후 거의 15년 만에 나온 히트 아이템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에너지 음료는 타우린과 카페인이 들어 있어 마시면 잠이 깨고 힘이 나는 듯한 각성효과를 주는 음료다. 중·고교생과 대학생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 “시험기간 도서관 쓰레기통은 레드불과 핫식스 캔으로 꽉 찬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에너지 음료에 독일 증류주 예거마이스터를 섞은 폭탄주 ‘예거밤’은 젊은이의 클럽 문화를 상징하는 술로 자리잡았다.
한국의 에너지 음료 열풍은 다소 뒤늦은 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에너지 음료는 1997년 롯데칠성음료가 월드컵 열풍에 맞춰 내놓은 토종 에너지 음료 ‘레드데블스’가 실패한 이후 업계의 관심 밖이었다. 이에 비해 글로벌 에너지 음료 시장은 2000년대 들어 꾸준히 성장해 연간 200억 달러 규모로 추정된다.
국내 시장은 세계 에너지 음료 1위 브랜드인 ‘레드불’이 정식 수입되기 시작한 2011년 여름부터 급격히 커졌다. 롯데칠성이 2010년 3월 다시 출시한 ‘핫식스’가 밑바닥을 다졌고, 여기에 에너지 음료의 원조인 레드불이 상륙해 경쟁 구도를 만들면서 성장세에 불이 붙었다.
가격 인하, 덤 행사로 경쟁 치열
에너지 음료의 주 소비층은 10~30대다. 탄산에서 나오는 청량감을 제외하면 맛도 딱히 탁월하진 않은 이 음료를 왜 갑자기 많이 마시는 걸까. 무엇보다 커피나 자양강장제보다 강력한 각성효과가 인기 비결로 꼽힌다. 대표적 자양강장제인 ‘박카스’의 카페인 함량은 30㎎지만 에너지 음료는 보통 60㎎을 넘는다. 업체들도 공부·야근·운전 때 집중력을 높여주는 음료라는 점을 마케팅 포인트로 내세웠다.
레드 데블스가 실패한 1990년대와 달리 요즘 젊은층은 에너지 음료에 대한 친숙도가 높기 때문이란 시각도 있다. 해외 연수·체류 경험이 있는 비율이 높고, 클럽에서 예거밤 등으로 에너지 음료를 접해본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CU 관계자는 “레드불이 출시 직후 하루 평균 6000캔씩 팔리면서 깜짝 놀랄 실적을 냈는데 주로 유학파, 외국인 등 레드불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설명했다.
후발 주자들도 대거 뛰어들어 코카콜라 ‘번인텐스’, 해태음료 ‘볼트에너지’, 웅진식품 ‘락스타’, SPC그룹 ‘파우’가 잇따라 나왔다. 롯데칠성은 자체 브랜드인 핫식스 외에 세계 2위 브랜드 ‘몬스터’의 국내 판권도 있다. 그러나 핫식스 매출을 잠식할 가능성이 있어 출시를 미뤘다. 핫식스는 출시 첫해인 2010년 전체 매출이 55억원이었으나 요즘엔 매달 50억원어치를 판다.
국내 에너지 음료 시장은 한 캔에 10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을 앞세운 핫식스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핫식스는 60%대, 레드불은 20%대 점유율을 각각 기록했다. 군소 브랜드들이 나머지를 조금씩 나눠 갖는 구도다. 미국에서 절반 가까운 점유율을 차지하는 레드불로서는 ‘굴욕적’인 상황이다. 레드불은 160여개국에서 팔린다. 음료 브랜드로서 가치는 코카콜라·펩시에 이어 셋째로 평가 받고 있다.
레드불은 2월 들어 한국 판매 가격을 30% 넘게 내렸다. 편의점 가격을 한 캔에 2900원에서 2000원으로 31% 내렸다. 주 소비층인 10~30대의 경제력을 감안할 때 “너무 비싸다”는 지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레드불코리아는 지난해 말 오스트리아 본사를 설득해 이를 관철했다. 음료 업계 관계자는 “레드불은 완제품으로 국내에 수입하기 때문에 물류비와 관세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며 “한국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자체 마진을 줄이고 본사에 지급하는 로열티까지 대폭 깎은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국내 브랜드들은 레드불의 가격 인하에 대응하기 위해 할인·증정 행사를 경쟁적으로 확대했다. 세븐일레븐은 2월에 핫식스 360㎖ 대용량 제품을 2300원→1150원으로, 락스타는 1900→950원으로 50% 할인판매에 들어갔다. 1000원짜리 번인텐스와 볼트에너지 블루는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덤으로 주는 1+1 행사도 시작했다.
세븐일레븐 최민호 과장은 “에너지 음료 브랜드가 증정보다 소비자들의 체감 효과가 훨씬 높은 50% 할인까지 들고 나온 것은 소비자들이 가격을 인하한 레드불로 관심을 돌리지 못하도록 적극 방어에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2월 레드불의 시장점유율은 가격 인하에도 별 차이가 없었고, 오히려 매출만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음료 업체 관계자들은 레드불에서 시작된 가격 인하 경쟁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본다.
에너지 음료 시장이 이처럼 커지는 가운데 에너지 음료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카페인이 많이 들어있는 음료인데도 청소년에게 무분별하게 팔리고 있어서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에너지 음료 한 캔당 카페인 함량을 조사한 결과 핫식스가 61.85㎎, 레드불은 62.5㎎, 번인텐스는 78.05㎎였다. 정식 수입업체를 통하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일부 들어오고 있는 몬스터는 무려 207.35㎎에 달했다.
우리나라의 하루 권장 카페인 섭취량은 성인이 400㎎, 임산부는 300㎎, 어린이와 청소년은 체중 1㎏당 2.5㎎ 이하다. 초·중·고교생은 에너지 음료를 한두 캔만 마셔도 일일 권장량을 넘는다. 카페인에 중독됐다가 갑자기 끊으면 두통·불안·흥분·불면·소화장애에서부터 심하면 경련·우울증의 금단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올해부터 카페인 함량이 ㎖당 0.15㎎ 이상인 고카페인 에너지 음료에는 카페인 함량과 함께 ‘어린이, 임산부, 카페인 민감자는 섭취에 주의해야 한다’는 문구를 반드시 표기하도록 했다. 또 학교 매점처럼 청소년이 많이 이용하는 곳에서는 이런 음료를 팔지 못하도록 추진하고 있다.
식약청 관계자는 “의약품이 아닌 일반 음료 제품이라는 한계 때문에 정부가 무작정 규제만 하기도 어렵다”며 “성분 정보를 소비자가 알기 쉽게 정확히 표기하고 과다 음용의 부작용을 청소년들에게 알리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도 에너지 음료를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상원의원 3명이 식품의약국(FDA)에 에너지 음료의 위험성 조사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낸 데 이어, 미국 플로리다주 매내티카운티는 아예 이번 학기부터 공립학교 내 에너지 음료 판매를 금지했다.
미국 약물남용·정신건강청(SAMHSA)이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에너지 음료 복용 탓에 응급실을 찾은 환자 수는 2007년 1만명에서 2011년 2만명으로 급증했다. 10대 청소년의 31%가 에너지 음료를 상습적으로 마신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2011년 12월 미국 메릴랜드주에서 ‘몬스터’란 에너지 음료를 마신 뒤 심장마비로 숨진 14세 학생의 부모가 제조업체를 고소했다.
카페인 과다 섭취 부작용 경고 잇따라
카페인 과다 섭취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지만 에너지 음료 시장은 올해도 고성장을 이어갈 전망이다. ‘마시면 힘이 나는’ 음료에 청소년과 젊은 직장인이 열광하는 건 이들의 삶이 피곤하기 때문은 아닐까. 편의점에서 에너지 음료가 가장 많이 팔리는 시간대는 밤 9시에서 자정 사이라고 한다.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고 일해야 하는 이들이 많이 찾는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