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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 기업들, 싱가포르 러시… 낮은 세금 때문만은 아니다

도일 남건욱 2013. 4. 6. 11:03


기업에 계속 "원하는 게 뭐냐", 기업이 원하는 인재 키우려 대학 커리큘럼도 쉽게 바꿔
4대 허브전략, 리콴유 前총리 시절엔 금융·오일허브로 경제 발전
아들 리셴룽 총리는 바이오·워터허브로 수년 전부터 성장동력 준비
미래 먹거리 도시운영 솔루션, 에너지·물 어디서 조달하고 음식은 어떻게 배분하는 지…

 싱가포르 국립수자원공사(PUB)의 수처리 플랜트 전경.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이 플랜트에서는 하수를 하루 36만t 처리해 공업용수로 쓰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물의 40%를 수입하는 싱가포르는 2006년 물 산업 육성 전략을 발표한 뒤‘워터 허브’로 발돋움 중이다./블룸버그 제공
싱가포르는 '레드 닷'(red dot·붉은 점)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세계 지도에서 보면 너무 작아 점처럼 보이지만, 이 나라 경제는 상징색인 붉은색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국토 면적은 서울만 하고, 인구는 530만명에 불과하다. 천연자원도 거의 없고, 모든 먹거리를 수입하며, 물도 절반은 수입해 쓴다. 그런데도 1인당 GDP는 5만달러(2012년)로 한국의 2배가 넘는다.

세계적인 경영 대가(大家)들은 이 작은 도시 국가를 혁신과 발전의 모델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도미니크 바튼 맥킨지 회장은 최근 Weekly BIZ와의 인터뷰에서 "싱가포르는 마치 혁신기업 P&G(프록터앤갬블) 같다"고 했고, 존 라이스 GE 부회장은 "싱가포르와 그 지도자가 선택한 결정이 작은 섬 국가를 강력한 경제 발전소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무엇 원하는가" 기업에 게속 묻는 정부

"우리는 글로벌 기업들을 손님으로 대하는 '주인'(host)이 아니라 그들이 진정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집'(home)이 되고자 합니다."

림 스위 니안(Nian) 싱가포르 경제개발청(EDB) 부청장이 "왜 이곳이 글로벌 기업들에 인기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내놓은 대답이다.

경제개발청은 싱가포르의 성장과 해외 기업 유치 전략을 총괄하는 기관이다. 그는 "남들은 낮은 세금 때문에 기업들이 싱가포르에 몰려들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부수적인 것"이라며 "기업들의 연구·생산에 필요한 인프라와 환경을 갖춰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글로벌 기업들이 싱가포르로 모여드는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기업이 원하는 인력을 싱가포르가 정부 차원에서 키워낸다는 점이다. 기업이 필요한 인재 육성을 위해 대학 커리큘럼도 쉽게 바꾼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국내에 없으면 해외에서 데려올 수 있도록 돕는다.

더 나아가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기를 꿈꾸는 기업들을 위해 기업의 입장에서 신사업 아이디어를 먼저 내고, 지원한다. 대표적인 글로벌 소비재 생산 기업인 P&G도 이런 과정을 통해 유치에 성공, 뿌리를 내리게 했다. 싱가포르는 P&G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하고 끊임없이 물었고, P&G가 원하는 전문가를 키우거나 해외에서 데려오게 했다. P&G가 원하는 신사업, 새로운 시장 진출에 관한 아이디어도 제공했다. '토털 솔루션'을 준 것이다. 기업이 정부를 믿을 수 있도록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도 효력을 발휘했다.

 (왼쪽)한 수처리 플랜트 직원이 수처리로 만든 재생수 (New water)를 손에 들고 있다.(오른쪽)싱가포르 바이오폴리스지역의 한 제약회사에서 연구원이 현미경으로 치료 물질을 분석하고 있다.
◇10년을 내다본 바이오 허브 전략으로 P&G 유치

싱가포르는 물적·인적자원이 부족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4대 허브(hub) 전략을 추진해 왔다. 해외의 우수한 기업과 인력을 적극 유치하고, 국가 전체를 전 세계 기업과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허브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과거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 집권 시기(1965~2002)에 싱가포르가 명실상부한 '오일 허브'와 '금융 허브'로 발돋움했다면, 그의 아들인 리셴룽 총리는 여기에 '바이오 허브' '워터 허브'를 더해 미래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26만㎡의 대지에 9개의 고층 빌딩이 들어선 바이오폴리스(Biopolis) 연구단지. 화이자, 노바티스, 글락소스미스클라인 등 세계 20위권 다국적 제약사 중 8곳이 R&D센터나 생산 시설을 두고 있는 곳이다.

세계 최대 생활용품 회사 P&G는 작년 말 화장품·생활용품 등 핵심 사업 부문 본사를 미국에서 싱가포르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2011년부터 2억달러를 들여 짓고 있는 P&G 이노베이션센터는 2013년에 완공돼 총 500명의 고급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곳엔 싱가포르 R&D 전반을 지원하는 과학기술청(ASTAR)과 산하 연구소, 듀크-싱가포르국립대학원이 함께 자리 잡아 산·학 협조도 쉽다.

싱가포르는 10여년 전부터 생명과학을 미래에 싱가포르를 먹여 살릴 산업으로 보고 이곳을 '바이오 허브'로 육성할 계획을 세웠다. 생명과학을 전공하는 우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폭 지원하며 고급 연구 인력을 육성했고, 각종 세제 편의를 제공하면서 기업을 유치한 것이다. 싱가포르 정부가 2011년 R&D를 위한 물적·인적자원에 투자한 돈은 전년보다 15% 늘어난 74억싱가포르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 결과 2011년 싱가포르 제조업에서 바이오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2%에 달했다.

에이블린 호 과학기술진흥청 부국장은 "우리는 바이오, 물리학, 공학 등 다양한 과학기술의 융합을 위해 바이오폴리스와 함께 과학기술 융합 단지인 '퓨저노폴리스(fusionopolis)'를 함께 구축, 학문 간 경계를 없애고 있다"며 "이런 점 역시 글로벌 기업들이 싱가포르를 선호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싱가포르는 또 다른 미래 산업의 하나로 '물 산업'을 선택해 '워터 허브'로 발돋움하려 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로부터 필요한 물의 40%를 수입하는 싱가포르는 2006년에 물 산업 육성 전략을 발표했다. 2015년까지 일자리 1만개와 GDP 17억싱가포르달러(약 1조5000억원)를 창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수(水) 처리 기업은 2006년 50개에서 2011년 100개로 늘었고, 수 처리 R&D센터는 3개에서 25개로 늘었다. 셈콥·하이플럭스·다코워터 같은 싱가포르 수 처리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고, 이들은 물 정화 기술을 해외로 수출하고 있다. 또한 GE나 지멘스 같은 글로벌 기업의 수 처리 공장이 싱가포르에 들어와 투자와 고용을 일으키고 있다.

싱가포르는 요즘도 새로운 먹거리를 계속 준비하고 있다. 요즘은 신흥국의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도시 운영 통합 솔루션 제공 산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에너지와 물은 어떻게 조달하고 저장·활용할 것인지, 음식은 어디서 가져오고 배분할 것인지, 도시는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등의 문제에 통합 시스템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니안 경제개발청 부청장은 "우리는 늘 '글로벌 메가 트렌드'가 무엇인지 고민한다"며 "미래에 어떤 산업이 우리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투자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