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핵주권
서명 : 한국의 핵주권
저자 : 이정훈
출판사 : 글마당
내용 약간 :
한국은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 으로 이어지는 오너십 가진 독재자가 있었기에 급속한 경제 성장을 했고 원자력의 토대도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월급쟁이 사장'에 비유될 수 있는 시한부 대통령만 나오는 세상이다.
당장의 실적이 중요하기에 원자력만을 위한 장기 투자를 하기 어렵다.
2014년만료되는 한미 원자력 협정의 개정도 중요한 문제이다.
인류가 원하는 4세대 원전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고준위 폐기물을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한국은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자원 빈국인 한국이 환경을 보존하면서 고도성장을 거듭하려면 원자력이라고 하는 대형 에너지원을 늘려야 한다.
그리고 원전에서 나오는 사용후연료를 평화 목적으로 재처리할 수 있어야 방폐물을 줄일 수 있다.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정부는 이문제 해결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 콜롬보계획과 인도 그리고 한국 -
콜롬보 계획의 일환으로 캐나다는 1956년 CIRUS라는 이름의 중수로를 만들어 인도에 제공했다.
현박사는 특정국가(미국)의 원자로만 도입하면 우리나라의 에너지 정책이 그 나라에 예속된다는 것을 이유로 원자로 도입의 다변화를 주장했다.
"캐나다의 CIRUS 원전은 천연우라늄을 사용하기에 연료비가적게 들 것이다" 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한국은 미국과 맺은 원자력협정에 따라 미국에서 농축한 우라늄을 도입해야 한다.
미국이 농축우라늄 공급을 끊으면 한국의 원자로는 멈춰서야 한다. 그러나 천연우라늄은 농축을 하지 않는 것이기에 캐나다를 비롯한 여러나라에서 구할 수 있다.
중수로 건설과 관련해 주목할 것이 있다. 한국이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 이 원자로 도입을 서둘렀느냐는 사실이다.
오원철 당시 대통령 경제2수석 등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어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 여건으로 볼 때 안보를 생각해서 중수로를 도입했다는 가정은 충분히 해볼 수 있다.
당시 한국은 북한이 캐나다에 있던 교포 학자 김결하씨를 영입해(1972년), 1975년 그램 단위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1964년 10월 중국의 신화사 통신은 그해 10월 15일 중국 최초의 핵실험을 성공시켰다고 보도했다.
인도는 바로 핵개발을 추진했다.
캐나다에서 제공받은 CIRUS 원자로에서 나오는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원자폭탄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인도는 1974년 5월 18일 비밀리에 핵실험을 실시하여 성공시켰다.
이후 미국은 핵확산금지조약(NPT)를 만들고 원자로에서 나온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해서 핵폭탄을 개발하는 것을 철저히 막기 시작했다.
NPT 조약은 기존의 핵무기 보유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만 핵무기를 보유하고 나머지 국가는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
인도는 이 조약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은 인도를 제재할 수 없었다.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했을 때 캔두형 원자로 도입을 추진하고 있던 나라가 바로 한국과 대만이었다.
닉슨 대통령의 방중후 대만에 주둔한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켰다.
그리고 취한 조치가 대만이갖고 있던 NRX 원자를 철거하고 말았다. 미국이 다음으로 주목한 나라가 한국이었다.
한국이 인도의 핵싦험 8개월 후인 1975년 1월27일 캐나다의 AECL과 캔두형 원자로 도입 계약을 맺자 미국은 눈에 불을켜고 한국의 의중을 살피려고 했다.
미국은 한국이 원자로를 도입하려면 핵무기 개발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NPT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5년 4월 23일 박정희 정부는 NPT를 비준함으로써 미국이 캔두형 원자로 도입을 방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NPT에 가입하기 전 그는 계속해서 핵개발 의지를 피력해 미국을 긴장시켰다.
이러한 박정희 정부를 달래기 위해서 "미국은 핵우산을 제공하겠다." "주한미군을 줄이지 않겠다" 는 등의 약속을 거듭했다.
이러한 벼랑끝 전술의 원조는 6.25전쟁 때 실제로 반공포로를 석방해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 현대화 계획을 받아낸 '이승만'이고, 달인은 미국의 핵우산 제공을 끌어내 한국을 근대화시킨 '박정희'이다.
1950년대 원자력을 착상시키기 위한 이승만 정부의 노력도 대단했지만 1970년대 원자력발전을 일으키기 위한 박정희 정부의 노력도 집요했다.
미국의 압력으로 NRX 연구용 중수로를 폐쇄한 대만은 끝내 캐나다산 중수로를 도입하지 못했다.
현재 캐나다산 중수로를 보유한 나라는 캐나다와 한국, 아르헨티나뿐이다.
인도는 CIRUS 중수로를 자체적으로 발전시킨 중수로를 가지고 있다.
같은 시기 일본은 플루토늄도입뿐만 아니라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위탁재처리까지 할 수 있었다.
훗날 한국원자력 연구소장(1999-2005년)이 되는 장인순 박사는 1990년 초반, 일본을 방문해 플루토늄을 추출했을 때를 찍은 동영상을 보았다.
장박사의 회고다.
"플루토늄 추출에 성공했다는 결과가 나오자 일본 연구진들을 펑펑 눈물을 흘렸다. 군인도 아닌 순수 과학자인 그들이 왜 울겠는가?
플루토늄의 추출이 확인되었을 때 그들의 뇌리에는 1945년 원폭 투하로 죽어간 친지와 동료들과 힘들었던 그들의 젊은 시절 그리고 패전한 조국의 고통 등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테마에(진심을 감춘 얼굴)' 속에 감춰진 일본인들의 '혼네(속마음)'를 보는 것 같아 전율이 느껴졌다."
1979년 3월 28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스리마일 섬 원전 2호기에서 원자로가 과열돼 녹아내리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원자로는 1미터 내외의 두께를 가진 격납용기 안에 들어 있어서 녹아내린 원자로에서 나온 방사성 물질은 격납용기 안에 들어 있어서 녹아내린 원자로에서 나온 방사성 물질은 격납용기 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했다.
스리마일 섬 원전 2호기 사고는 주변 환경과 사람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유럽에서 반핵운동이 일어났다.
19070년대 후반 서방세계 원자력계의 서열은 영국이 탈락했고 미국이 가장 앞선 가운데 프랑스와 일본이 뒤를 따르고, 한국이 쫒아가는 모앙새가 되었다.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군사적으로도 북한에 밀리지 않고, 원자력 레이스에서도 탈락하지 않는 불굴의 모습을 보였다.
1979년 '원자력 맨'인 박정희 대통령이 상업용 원자로 가동이라는 큰 업적을 세우고 사라졌다.
아듀! 박정희-
서평:
현재 한국에는 반전반핵 운동과 북한의 핵무기 위협에 처해있는 상황이다.
이 책의 첫페이지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지금은 오너십을 지닌 지도자만이 한국 원자력을 세계로 뻗어나가게 할 수 있다"
작금의 북한의 3차 핵실험 성공에 이은 핵무기 협박과 한국 내의 월성 원자력 발전소 수명연장 반대운동의 직면해 있다.
월성원자력 발전소는 캐나다산 중수로 발전소로서 인도는 같은 기종의 발전소를 운영하면서 발생하는 사용후 핵연로를 기반으로 핵무기를 개발했다.
따라서 한국은 캐나다 산 CIRUS 중수로의 수명연장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한국이 자위적 핵무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발전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