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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중희(이하 류): 최근 들어 3차원(D) 프린터에 대한 관심이 대단합니다. 3D 프린터가 보편화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박해천(이하 박): 10여년 전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죠. 쾌속 조형기술로 불렸는데, 시제품의 외형을 단시간에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어요. 당시 국내 대학에서도 정부 지원을 받아 이 기계를 많이 구매했어요.
류: 최근 3D 프린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개인도 구매할 수 있을 정도의 낮은 가격’인 것 같습니다. 가정에 있는 일반 프린터로 문서를 손쉽게 찍듯이, 어떤 물건이라도 파일로 받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오는 걸 의미하겠죠. 변화의 핵심은 ‘오픈소스 하드웨어’라고 불리는 개방형·참여형 설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핵심 기술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고 그 데이터를 개량해 다시 공개하고요. 3D 프린터를 중심으로 과거 소프트웨어에서 있었던 변화가 하드웨어로 확산되고 있어요.
박: 1950년대 미 국방부의 지원을 받아 MIT에서 개발한 ‘수치 제어 공작기’와 개발과 혁신을 통해 ‘노동자 없는 공장’이라는 포스트 포드주의의 비전이 3D 프린터까지 당도한 셈이군요.
류: 확실히 제품을 생산하는 노동자의 역할은 줄었지만, 대신 새로운 형상을 창조하고 설계하는 역할은 늘어나지 않을까요? 공산품이 아닌 나만의 제품을 손쉽게 직접 출력하는 일 같은 거 말이죠.
박: 크게 두 가지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DIY(Do It Yourself) 제품 조형의 가능성과 대량 생산 시스템 자체의 내적 변화입니다. 전자라면 그동안 미래학자들이 강조한 소품종 소량 생산의 시대가 오는 거겠죠.
류: 예, DIY 측면에서는 이미 많은 예술가나 공예가가 3D 프린터를 활용하고 있어요. 인터넷 공예품 거래 사이트에서 3D 프린팅 된 제품을 홍보하는 별도의 섹션이 있을 정도로요. 소품종 소량 생산이 실제로 이뤄지려면 그 수많은 제품을 누가 설계하느냐가 관건일 것 같습니다. 노동력이 단순 반복 제조에서 창의적 디자인으로 전이 되는 시작점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박: 아직까지는 알 수 없어요. 10여년 전 쾌속 조형기술이 등장했을 때도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거든요.
류: 패션 업계의 예를 보면, 다품종 소량 생산의 SPA 브랜드(기획·생산·유통까지 직접 하는 브랜드)와 소품종 한정 생산을 대표하는 명품, 두 가지 성공사례가 있는데요. 대부분의 공산품이 그렇게 진화할 것 같기도 합니다.
박: 하하하. 미래에도 결국은 유니클로와 루이비통으로 양극화 하는 건가요?
류: 아까 두 가지 방향을 이야기할 때, 대량 생산 체계의 내적 변화를 말씀 하셨는데요. 이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창조되던 아날로그 세계의 사물이, 디지털이라는 도구를 통해 창조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박: 그렇죠. 특히 외형이나 시각적 부분에서요. 역사적 사례를 보면 알 수 있어요. 1950년대 자동차 디자인을 보면 유럽과 미국이 완전히 다른 조형 문법을 보여줍니다. 미국의 GM은 크롬 도금의 라디에이터 그릴을 과장되게 달고 매우 복잡한 곡면을 표현하는 덩치 큰 디자인을 만들어냈어요.
반면 유럽의 포르셰는 물방울처럼 단순 명료하면서도 유기적 곡면 표현에 집중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당시 유럽의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3D 모델을 만들 때 목각으로 만들었어요. 나무를 대패로 깎으면서 자동차 곡면의 가능성을 실험했던 거죠. 미국 디자이너들은 클레이라고 불리는 찰흙으로 표면 처리를 했죠.
류: 그렇다면 3D 프린터라는 새로운 도구가 결국 새로운 디자인 방향을 만들어 내겠네요.
박: 세상 자체를 완전히 뒤바꾸지는 못하겠지만 점차적으로 그런 새로운 형태의 사물이 늘 겁니다.
류: 아톰(원자)이 아닌 비트가 형상을 결정짓는 시대가 온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합니다. 현실을 잘 모사하는 것이 훌륭한 컴퓨터의 덕목이었는데, 이제는 컴퓨터에서 더 손쉽게 그려 낼 수 있는 형상들로 현실이 채워지게 생겼으니 말이죠.
박: 모니터 안에 감금된 조형을 3D 프린터가 빠른 속도로 현실 세계로 이끌어내기 시작한 것이죠.
개개인 창의성 더 중요해져
류: 3D 프린터가 모든 가정에 한대씩 보급된다면 대량 생산 방식 자체에도 큰 변화가 오겠죠? 똑같은 물건을 공장에서 찍어 내는 것보다 온라인 스토어에서 3D 설계도를 판매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테니 말이죠. 물건을 소비자의 손에 전달해야 하는 물류비용까지 감안하면 더욱 그럴 가능성이 크겠죠.
박: 우선은 새로운 취미 활동 영역으로 각광 받겠죠. 프라모델·레고·아트토이 매니어들은 바빠질 겁니다. 이 부분의 시장은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3D 프린터로 DIY하는 일상 사물이나 액세서리 시장 말입니다.
류: 예, 더 재미있는 건 3D 프린터에 전자회로 등도 같이 프린팅 할 수 있는 기능을 넣으려는 시도인데요. 이렇게 되면 단순히 형상 외에 기능까지 출력이 가능하죠. 물론 표준화된 부품을 조립해야 하는 숙제는 있죠. 디스플레이나 배터리, 프로세서같은 것을 모두 프린팅하는 것은 아직까지 공상과학의 범주니까요.
박: 요즘 그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흥미로운 대목이지요.
류: 미국 MIT대에서는 4D 프린팅이라고, 형상기억합금처럼 특정한 상황에서 모양이 변하는 사물을 프린팅하는 기술을 선보이기도 했어요. 이렇게 단순 형상만이 아닌, 특정 기능까지 포함한 사물을 출력할 수 있게 된다면, 규제가 유명무실해지는 경우도 상당히 많아질 것 같아요. 생산 및 판매가 금지된 물건들, 대표적으로 총기 문제가 나올 수 있겠죠.
박: 과거 쾌속 조형기술 도입 초기에 그런 상상을 보여주는 영화 장면이 있었습니다. 영화 쥬라기공원3에서 벨로키랍토르의 성대 화석을 3D 스캐너를 읽은 뒤 모델을 만들어내고, 그걸 들고 다니며 입으로 불면서 벨로키랍토르를 유인하는 장면이죠.
류: 재미있네요. 3D 프린팅이 단순히 인간이 만든 규제가 아니라 시간까지 뛰어 넘는 장면이군요.
박: 방금 예를 든 것 같이, 3D 프린팅을 활용한 새로운 상황이나 시나리오들이 많이 만들어져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현실세계의 실용화 가능성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 말이지요.
류: 결국, 도구의 진화 속도보다는 인류 창의성의 발전 속도가 문제일 듯해요. 이런 도구들을 어릴 때부터 접하고 써온 신인류들은 충분히 전혀 다른 뭔가를 만들어 내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