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에 개봉한 영화 ‘뷰티플 마인드(A Beautiful Mind)’의 무대는 1940년대 전 세계 최고의 수재들이 모여들던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원. 웨스트 버지니아 출신의 존 내쉬(러셀 크로우)는 자타가 인정하는 수학 천재다.
그는 천재의 전형이 그러하듯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무뚝뚝하며 오만에 가까운 자기확신의 인물이다. 정규 수업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가 기숙사 유리창을 노트 삼아 집착한 문제는 바로 인간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는 ‘균형이론’을 정립하는 것이다.
어느 날 그는 학교 근처 술집에서 금발의 미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친구들의 신경전을 지켜보다가 섬광 같은 직관으로 ‘균형’의 단서를 발견해 낸다. 이를 발전시켜 1949년에 27쪽짜리 논문으로 발표한 그는 하루 아침에 학계의 스타로 떠오른다. 과연 내쉬는 술집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금발의 미녀 차지하려는 신경전 지켜보다가…
모든 남성들이 금발의 퀸카 여성에게만 동시에 데이트 신청을 하면 고작 단 한 명만이 선택될 뿐이다(물론 아무도 낙점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겠지만). 그럼 나머지 선택 받지 못한 불행한 남자들은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평범한 외모의 다른 여성들에게 우르르 몰려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졸지에 닭 신세가 되어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여성들이 순순히 마음을 열리 만무하다. 결국 퀸카 커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남성과 여성들은 자기짝을 찾지 못하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내쉬가 예견한 짝짓기 게임의 균형상태다.
영화 속 청춘들의 이런 의도와 행동들, 그리고 그 결과 비롯되는 최악의 상황을 모두 고려했을 때 과연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내쉬의 처방은 한마디로 각자 주제를 파악하라는 것이다. 모든 남성들은 애당초 분에 넘치는 금발 퀸카에게 한눈 팔지 말고 각자의 처지에 맞는 보통의 여성들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면 된다. 그리고 여성들은 마음을 열고 이들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이면 그때 바로 최악의 상황을 벗어난 새로운 균형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게임이론은 한 마디로 균형을 찾는 학문이다. 복수의 개인과 조직이 각자의 이득을 극대화하고자 경쟁하는 상황에서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가 도출될 것인지를 미리 예측해보는 게 목적이다. 내쉬의 위대함은 모든 비협조적(Non-cooperative) 게임 상황에서 안정적인 균형점, 즉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입증했다는 데 있다. 내쉬 균형에서는 게임 참가자들 중 어느 누구도 현재의 균형에서 벗어나려는 동기가 없어진다. 마치 자연 생태계가 고요한 평형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쉬의 균형 개념을 이론적 토대로 삼은 게임이론은 경제학뿐 만 아니라 정치·경영·사회·심리·인류·생물학 등 놀라울 만큼 다양한 분야로 활용 범위를 넓히게 된다. 이 업적을 인정받아 내쉬는 1994년 존 하사니, 라인하르트 셀텐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그 뒤를 이어 1996년, 2005년, 2007년에도 노벨 경제학상은 게임이론가들에게 돌아갔다.
비즈니스는 게임의 결정판이다. 어느 날 A사가 경쟁자인 B사의 고객을 빼앗고 시장점유율을 높일 목적으로 전격적으로 가격 할인에 돌입했다고 하자. 이를 눈치 챈 B사도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고 A사보다 좀 더 가격을 내리는 것으로 대응한다. 뒤늦게 ‘아차’하는 생각도 들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된 상황에서 A사는 또다시 가격 인하에 돌입하게 되고….
결국 두 업체 모두 나름대로는 매 순간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균형에 도달하고 만다. 실제 비즈니스 현장에서 종종 목격되는 출혈경쟁이나 치킨게임 등이 모두 이런 가격전쟁(Price War) 게임의 최종 균형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위기는 새로운 균형 찾아가는 과도기
이 사례에서 보듯이 게임이론에서 예측되는 균형이 반드시 모두에게 행복한 최적(Optimum) 상태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기업 입장에서는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균형이 도출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이 어떤 전략을 구사할지를 미리 내다보고 거기에 맞는 가장 최선의 대응책을 모색하는 것은 기본이다.
나아가 자신이 어떤 전략을 취할 것인지에 대해 상대방에게 명시·암묵적으로 신호를 보내거나(Signaling), 혹은 평소의 평판(Reputation) 관리를 통해 상대방의 전략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평소에 지독한 터프가이라는 인상을 심어 놓거나 스스로 퇴로를 없애 버리거나 한다면 누가 과연 내게 함부로 대들겠는가). 최근의 경제민주화 입법에서라면 언론과 사업자 협회 등을 통해 정부가 새로운 게임의 룰(Rule of game)을 만들도록 유도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다.
기업 경영을 둘러싼 환경은 계속 변하게 마련이다. 특히 최근과 같은 상시 위기의 상황이라면 변화의 폭과 방향, 속도를 따라잡기가 힘들 지경이다. 미래 성장동력으로 주목 받은 폴리실리콘이나 전기차 사업만 봐도 그렇다. 파산한 기업이 속출했는가 하면 나머지 기업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극심한 불안감에 빠져있다. 한마디로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과도기인 것이다.
‘위기는 기회’라고 과거의 균형 상태에서 별 이득을 보지 못한 기업에게는 이런 불균형 상황이 새로운 기회다. 경쟁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차분히 미래의 새로운 균형 시나리오를 예측하고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균형점이 달성될 수 있게끔 지금 최선의 전략 옵션을 준비하고 가다듬을 필요가 있겠다.
영화와 관련된 에피소드 한가지. 전 세계에 생방송 된 200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존 내쉬를 열연한 러셀 크로우는 남우 주연상에 호명된다. 그러나 그 순간 카메라에는 그의 얼굴이 잡히지 않는다. 사회자와 방송 진행팀이 혼비백산 했던 것은 당연지사. 후일담은 러셀 크로우가 수상 직전의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흡연의 유혹에 굴복해 자리를 이탈해서였다. 인류가 낳은 한 시대의 천재를 연기한 것에 대한 감당하기 힘든 중압감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