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적공간(堆積空間): 왜 노인들은 그곳에 갇혔는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있지요.
이 가운데 하나가 노년이라 생각합니다.
한 퇴직한 교수님이 쓴 노년의 단상을
읽었는데 대책은 없지만 잔잔한 감동과 숙연함이 담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퇴적공간(堆積空間): 왜 노인들은 그곳에 갇혔는가
1. 노인이 된다는 것.
필연적인 일이지만 젊은 시절에는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는 일.
나이가 들고 신체가 노쇠해지면서 자연스레 따라오는
변화를 감지하게 되는 일.
자신이 더 이상 현역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지난하게
이어지는 인생을 살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일. 그리고 고독과 친해지는 일.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고독의 시간이 결국 내 몫이며
내가 겪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
나는 그렇게 나이든 이들이 머무는 공간은 어떠할까.
2. 재직하고 있었던 대학에서 퇴임을 한 후
나는 한동안 탑골공원과 종묘시민공원 일대를 탐사했다.
‘탐사’라고 하는 까닭은 나의 발걸음이 내 안에
고인 어떤 질문을 해석하고자 하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교수라는 직함을 반납하는 동시에 나는 ‘노인’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인된 직업으로 일정 수준의 소득을
벌어들이지 않는 이상, 나이든 자는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인 잣대로 ‘노인’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갑자기 고독이 밀려왔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노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진지한 질문이 뒤따랐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섰다.
3. 서울에는 다른 나라의 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이 하나 있다.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이 만들어 낸
거대한 군집이 바로 그것이다. 대한민국의 노인이란
어찌 보면 참으로 불쌍한 존재다.
가족의 품으로 온전히 되돌아가지 못하고 유리방황하는 존재이다.
이 시간에도 노인들은 탑골공원에서, 종묘시민공원 광장에서
시간을 죽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들에게도 영광의 시절이 있었다.
한때는 자랑스러운 아버지로, 한 세대의 기수로,
나라의 산업 일꾼으로 살았건만, 그런 기억들은
추억의 잔해로 남아 있을 뿐이다.
4. 지금은 시대의 강물에 떠밀려 잉여의 존재로
퇴적 공간에 쌓여 있다.
이들은 어떤 사연으로 모여드는 것일까.
가족이 있을까. 있다면 가족 안에서의 위치는 어떨까.
가족이 없다면 어째서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이곳에 모여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5. 이런 개인적인 호기심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몇 달
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 책은 한마디로
강의 상류로부터 떠밀려 내려 하류에 쌓인 모래섬과
같은 ‘퇴적공간’을 탐사한 기록이다.
6. 퇴적공간에 쌓여 있는 잉여 인간들의 모습을 기록한
이 책은 노년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머지않아 다가올
미래의 본모습이다.
(-> 결론은 없는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년에 대해 진솔한 모습을 마치 실황 중개하듯이
해설을 더한 흥미로운 책입니다. 누구에게나 오는 노년을
좀 더 생산적으로 보낼 수 있는 개인의 습관이나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책입니다.)
-출처: 오근재, (퇴적공간), 민음인, pp.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