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하다 보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비딱해진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소설가 복거일은 참으로 특별하고 독특한 사람이다.
지나치다 할 정도로 세상을 ‘쿨’하게 바라보고 그런 의견을 펼쳐왔기 때문이다. 늘 소수의 의견을 펼쳐온 복거일에 대해 찬반양론이 엇갈릴 것이다. 그럼에도 젊은 날 나는 생각을 정립하는데 그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다.
복거일의 신작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는 암과 동행하는 한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자, 에세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의 단상과 일상이 어떻게 흘러 가는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이 죽음 앞에 서 있음을 담담하게 술회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애잔함이 묻어나는 글이지만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주는 메시지는 귀하다.
간암이란 선고를 받은 날 저녁 가족회의에서 저자는 “남은 날이 얼마나 될진 모르지만, 글쓰기에 쓸란다. 한번 입원하면, 다시 책을 쓰긴 어려울 거다”라고 조용히 이야기한다.
우리들 대부분이 마지막 순간까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않는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이 땅을 떠나야 하는지를 분명히 정리한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래도 아빠, 일단 살아야 하잖아?”라는 딸의 반응에 “작가가 작품을 쓰지 못한다면, 사는 게 얼마나 가치가 있겠나? 그리고 아빤 꼭 써야 할 작품이 있다”고 답한다.
죽음을 목전에 앞둔 상황에 맞는 외로움은 어떤 외로움일까? 가장 가까운 식구들조차 한 사람이 죽음에서 외로움을 덜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아내조차 남편이 가고 난 다음의 자신이 살아야 할 세월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은 섭섭해 할 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삶은 본질적으로 외롭다. 혼자 태어나고 혼자 죽는다”고 말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저자는 죽음을 앞두게 되면 현명한 사람도 갑자기 판단이 흐려지는 경우는 자주 목격하게 된다고 한다. 두려움과 고통에 압도된 나머지 종교에 귀의하는 모습을 그 사례로 드는데 복거일은 자신이 그렇게 할 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저자는 진화생물학에 대해 지식을 꾸준히 쌓아왔고 과학 소설도 여러 권 집필한 적이 있다.
그런 까닭에 내세를 약속하는 종교를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하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인간이란 “사람을 포함한 모든 종들이 박테리아들의 공생을 위한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저자도 죽음 안에 흔들리는 존재이겠지만 절망도 마음의 평정을 줄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오래 살면 좋겠지만 누구나 조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죽음을 맞는 일은 꼭 같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내세를 믿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을 고백하기도 한다.
“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뒤로는 자신이 내세를 믿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척 아쉽다. 내세를 믿는다면 슬퍼하는 아이에게 ‘아빠도 곧 네가 있는 곳으로 갈 거다’라고 얘기해줄 수 있을 터인데 말이다.”
암의 침투로 만신창이 되어 가는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면서도 저자는 사회와의 연결고리를 찾는다.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떠나고 난 다음의 나라의 앞날을 이렇게 전망한다.
“민중주의가 민주주의의 본질적 위험이듯, 응집력이 약해진 사회에선, 세포들로 이루어진 사람의 몸이든 개인들로 이루어진 인류 사회든, 그렇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배신자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암도 민중주의도 막기 어렵다.”
말년이 되면 누구나 내가 제대로 살아 왔는가라는 의문문에 답을 찾고 싶어한다. 특히 복거일은 주류에서 벗어난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저자 스스로 그런 의문을 가질 것이다. 다른 선택이 있었겠는가? 다수가 가는 길이 올바르지 않다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시대를 앞서기도 하고 다수 의견과 다르기도 했지만 그의 의견에 깊이 공감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일찍 사회주의의 몰락을 증명한 미제스란 인물이 있다. 그는 분석과 전망에 몰두하면서도 자신이 ‘모르는 줄도 몰랐던’ 지식에 겸허한 사람이었다. 미제스의 이 점에 대해 작가는 큰 의미를 부여한다. 유난히 목소리가 높은 이 시대를 두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지식인의 면모를 전혀 지니지 않은 사람들이, 적어도 지식에 관한 한, 터무니없이 오만한 태도를 지녔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런 풍토는 이 사회에서 오랜 세월동안 변화될 기미가 없을 것이며, 그런 까닭에 지적 오만이 가져오는 비용은 고스란히 지불하고 난 다음에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