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박사님이 읽은 책

구마 겐고, 재해가 준 건축의 변화

도일 남건욱 2015. 2. 9. 09:01
자신의 생각을 글로 잘 표현하면서도
건축계에서 우뚝 선 인물이 고마 겐고 씨입니다.
그의 최근작 ‘작은 건축’이란 책의 앞 부분에는
현대건축에 이르기까지의 변화에 관한 부분을
쉽게 소개해 두었군요.
특히 큰 재해가 가져온 건축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흥미를 넘어 아주 독특합니다.
1. 인간은, 행복할 때는 과거의 행동을 되풀이할 뿐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지만, 재해를 만나거나 비극을 당하면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건축사는 재해를 간과한 부분이 많았다. 
과학이나 기술의 발달을 이유로 삼거나 천재의 
개인적 재능, 발명, 창의에 의해 건축이
전진해온 것처럼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행복’의 건축사, 긍정적 건축사라는 체제가 일반적이었다.
그런 식으로, 고통스러운 사건이 계속 일어났던 역사를
밝고 가벼운 역사로 편집해온 것이다.
2. 그러나 인간이 그렇게 가벼운 존재였을 리가 없다.
사실은, 비극을 계기로 발명이나 진보의 톱니바퀴가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3. 재해 중에서도 가장 큰 비극은 1755년 11월 1일 유럽 전역을
공포에 빠뜨린 리스본 대지진이다.
전 세계 인구가 7억 명에 지나지 않던 시대에
5~6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리스본 대지진은 다양한 의미에서 세계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비극을 계기로 이른바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신에게 의지하지 않는다’는 위기감에서 계몽주의가
탄생하고 자유, 평등, 박애라는 사상이 나타나면서
30년 후의 프랑스 혁명과 연결되었다.
4. 그 중에서도 건축계의 반응은 매우 빨랐다. 
신이 인간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대,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둥지로서의 건축’이었다.
위기에 빠진 생물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사람들은 우선 지진이나 화재를 견딜 수 있는 강하고 합리적인
건축물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감각이 예리한 건축가는 즉시 새로운 건축의 그림을 그렸다.
프랑스 건축가들이 그린 스케치는 충격적이었다.
그 스케치는 현재 시각으로 봐도 이상하다.
그 때문에 비지오네르(幻視者)라는, 모멸적으로 들릴 수도 잇는
별명까지 붙었다.
5. 그 이전, ‘신에게 의지하는 시대’의 건축은
고전주의 건축과 고딕건축이라는 두 가지 양식이 지배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건축양식을 토대로 진화, 계승해온
고전주의 건축은 복잡한 규칙의 집합체였다.
우선 다섯 종류의 다른 디자인으로
이루어진 기둥(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복합식,
토스카나식)이 존재했다.
이것은 다섯 가지 오더라고 불렸다.
이런 기능의 건축에는 이런 오더가 어울린다는 식의 규칙이
존재했고, 모든 장식 또한 이 다섯 가지 오더와 연결되어
각각 의미를 지녔다.
6. 로마 제국이 막을 내리고 기독교가 거대한 힘을
가지기 시작한 중세에 고전주의 건축의 중심적 어휘였던
기둥이라는 수직성 강한 요소를 토대로 삼아, 그것을 더욱
숭고하고 섬세한 건축양식으로 발전시킨 것이 고딕 건축양식이다.
중세의 교회는 대부분 이 고딕 건축양식으로 지어졌고,
건축물 자체가 신에 대한 강한 신앙심의 표현이었다.
건축물은 성상이나 독특한 장식으로 포장되었고,
그 모든 장식과 묘사는 신을 찬미하는 목적을 담고 있었다.
7. 비지오네르들은 우선 긴 시간에 걸쳐 받들어온 이 규칙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들은 강하고 합리적인 건축을 지으려면
쓸데없는 장식은 필요 없고 장식을 결정하기 위한
규칙이나 관습 역시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강하고 합리적인 건축을 지향하면서
오더나 장식 대신 순수 기하학에만 의지해
디자인했다.
8. 그들 철골을 이용해 직사각형, 구, 원통 등 기하학적 형태가
자유롭게 표현되면서 강하고 합리적인 건축이 실제로
실현되기까지는 다시 100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100년 뒤 리스본 대지진으로 촉발한 근대과학이나 산업혁명
등의 성과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서 그들의 꿈이 실현되었다.
그들이 정말로 만들고 싶었던, 신을 부정하고
인간의 지성을 찬미하는 강하고, 합리적인 건축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순수 기하학에 근거를 둔 조형과 수학의 합리적인
구조 계산을 바탕으로 하는 20세기의 모더니즘 건축이다.
비지오네르 건축가들은 앞을 내다본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건축의 길을 연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9. 그 밖에 건축사에 큰 영향을 미친 재해들은 ...
1666년의 런던 대화재, 1871년 10월 8일 저녁에 발행해
800헥타르가 불에 타고 10만 명이 집을 잃어버린 시카고 대화재
등이다.
10. 그런데 쓰나미에 이른 원전 사고는 
‘강하고 합리적이고 큰’ 건축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다시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이제는 제로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강하고 합리적이었어야 할 건축물들이 쓰나미에 
맥없이 휩쓸려 사라지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면서
하나의 사상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사상이 시작되는
거대한 변화를 느꼈다.
-출처: 구마 겐고, (작은 건축), 인그라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