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양재찬의 프리즘] ‘환승입니다’란 말 아시나요

도일 남건욱 2008. 6. 15. 18:48
[양재찬의 프리즘] ‘환승입니다’란 말 아시나요
18대 국회 개원에 부쳐

국립국어원이 지난해 10월 초 우리말 사전에 없는 신조어를 발표했다. 2002~2006년 사이 5년에 걸쳐 조사해 발표한 신조어 중에 ‘국회스럽다’란 말이 있다.

국립국어원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비열하게 다투거나 비신사적인 행동을 일삼는 면이 있다”는 뜻풀이를 붙였다. 과거 국회에서 걸핏하면 벌여온 몸싸움과 파행, 날치기 통과를 바로 연상시킨다.

국회는 법을 새로 만들거나 손질하는 국민의 대의기관이다. 그만큼 의원들의 입법 활동이 중요하다. 하지만 역대 국회의 의원 입법안에 대한 처리 결과를 보면 의원 개개인이 독립된 헌법기관이란 말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17대 국회에 상정된 법안은 모두 7489건이었다. 이 가운데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은 6387건(85.3%)으로 정부 제출 법안(1102건)을 압도했다. 의원 발의 건수로 보면 15대 국회의 5.6배, 16대 국회의 3.3배에 이를 정도로 17대 국회가 많았다.

하지만 의원 입법안의 가결률은 17대 국회가 21.2%로 15대 국회의 절반에 머물렀다. 16대 국회의 가결률보다도 5.6%포인트 낮다. 의원들의 무성의와 도덕적 해이가 그만큼 심해졌음을 보여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부 제출 법안의 가결률은 51.1%로 의원 입법안 가결률의 두 배 이상이었다. 정부 제출 법안이 프로라면 의원 발의 법안은 아마추어였던 셈이다.

실태 파악과 실현 가능성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일단 “발의하면 되고~” 하는 식의 ‘나 몰라 법안’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동료 의원들끼리 발의 의원 명단에 이름을 빌려주는 ‘품앗이 발의’에다 행정부와 짜고 공무원이 만들어준 것을 자신이 만든 것처럼 꾸미는 ‘우회 입법’, 성의 없이 기존 법안을 몇 자 고치거나 서로 베껴 마치 새로운 개정안인 양 꾸미는 ‘짜깁기 법안’이 판을 친 결과다.

예산이 들어가는 법률안은 예산명세서를 첨부해야 하는데, 예산을 확보하지 않았거나 엉터리 통계를 바탕으로 적은 예산으로도 가능한 것처럼 꾸며 제출하기도 했다. 선거철이면 지역구 민원 해결용 선심성 법안이 발의 러시를 이루고.

법으로 사회 정의를 세우려면 의원들부터 법을 잘 지켜야 한다. 예산안 처리 법정 시한을 넘기는 것은 어느 새 예사로운 일이 되었다. 예산안 처리 시한은 물론 개원 국회, 정기 국회, 본회의 시작 시간을 꼬박꼬박 지켜야 한다. 방청석에서 지켜보는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말이다.

18대 국회 4년 임기가 5월 30일 시작됐다. 이구동성으로 민생을 강조하지만 299명 의원 중에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탈 때 들리는 ‘환승입니다’란 말의 의미와 그것이 던져주는 요금 할인의 기쁨을 아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개원 초기 지하철·버스 등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거나 소형차나 경차를 몰고 국회에 나오는 의원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마 안 가 대형 승용차와 접대 문화에 빠져 들고 만다.

당리당략보다 국리민복, 가진 자보다 없는 이, 강한 자보다 약한 이를 섬기는 자세로 봉사하겠다고 다짐하던 의원들도 어느 새 낯설어 하던 ‘국회스러운 파행 문화’에 익숙해진다.

지역민과 소속 정당의 뜻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겉으론 서로 돕고 살자는 상생의 정치를 내세우면서 안으론 서로 죽이는 살생의 정치를 일삼는다.

18대 총선 투표율이 46%에 머물고 국회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 것은 여야가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정치인을 위한 정치를 해온 탓이다. 대한민국 국회에서 여야가 건강한 정책 대결과 토론을 하는 모습이 TV로 생중계돼 드라마보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날은 과연 올 수 없는가.

건국 60주년의 해에 출범하는 18대 국회, 상생과 타협의 정치로 민생과 경제 살리기에 힘을 쏟는 ‘일 잘하는 국회’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4년 임기가 끝나는 2012년 봄 전혀 새로운 뜻의 ‘국회스럽다’란 말이 과거의 부정적인 의미를 대체했으면 한다.
양재찬 편집위원 (jayang@joongang.co.kr [940호] 2008.06.02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