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있어도 없는 척, 없어도 있는 척

도일 남건욱 2012. 2. 11. 14:57

있어도 없는 척, 없어도 있는 척

진재욱 하나UBS자산운용 대표

설 연휴를 앞둔 1월 21일에 재래시장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이 손녀에게 과자를 사주는 장면이 공개됐다. 그러면서 난데 없이 이 대통령의 손녀가 입은 패딩점퍼가 온라인을 중심으로 논란이 벌어졌다. 대통령의 손녀가 입고 있는 패딩점퍼가 프랑스제 명품 브랜드이고, 가격이 얼마에 이른다는 등의 얘기였다. 한쪽에선 이 대통령을 비난했고 다른 쪽에서는 왜 그리 난리 법석이냐며 갑론을박 했다.

이런 공방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미국과 홍콩서 십 수년을 살면서도 옷에 붙은 상표를 갖고 온 나라가 들썩이는 일을 본 적이 없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서, 모든 걸 흑백의 논리로 보려 하는 인색함이 안타깝다.

우리나라는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세계 10위권의 부국이며, 우리의 기업이 세계 곳곳을 누비며 많은 돈을 벌고 있다. 우리나라가 해외서 벌어들이는 것처럼, 우리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해외 상품을 사서 쓰는 게 지극히 정상적이다. 물론 명품도 포함된다. 충분히 그럴 만한 여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 만큼 향유할 수 있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 비난 받을 일은 아닌데 말이다.

왜곡된 시선 때문에 웃지 못할 일은 이뿐만 아니다. 몇 년 전에 벤츠 매장에 들른 적이 있다. 이때 영업직원이 우스갯 소리로 말하길 어떤 사람은 벤츠 S320을 사서 엠블럼을 S600으로 바꾸고, 어떤 사람은 S600을 사고도 남의 눈치 보느라 S320으로 바꾼다고 했다. 전자는 없어도 있는 척, 후자는 있어도 없는 척하는 거짓 꾸밈의 코스프레(게임이나 만화 속 등장인물로 분장해 즐기는 일)다.

있는 척, 없는 척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기 전에 이런 분위기를 만든 책임이 우리 사회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정당당하게 돈을 번 사람들이 위축되지 않고 떳떳하게 소비할 수 있는 성숙하고 열린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얼마 전 어느 베스트셀러 작가의 샤넬백이 또 한차례 화제거리가 됐다. 그가 그런 핸드백을 살만한 여력의 소유자라면, 그걸 트위터에 올려 비난한 사람이나, 굳이 샤넬이 아니라고 답변한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모두 민망하다. 열심히 번 돈으로 누리는 건전한 소비는 떳떳한 권리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국가 경제를 굴러가게 하는 데 꼭 필요하다. 돈은 위에서 아래로 돌게 마련이다. 부자가 제대로 써야 서민생활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없는 사람도 없으면 없는 대로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풍조가 돼야 한다. 형식과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사상 때문인지 유독 외모와 겉치레를 중시하고 이를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병폐가 여전한 듯하다. 오죽하면 한국을 외모지상주의, 성형공화국이라고 부르기도 할까.

이제 외모나 치장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무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차려 입어도 생각이 성숙하지 못하고 마음이 꼬여 있다면 가난한 사람이다. 마음이 얼굴을 만든다고, 수수한 외모이지만 교양 있는 언행과 넉넉하고 성숙한 마음씨가 있다면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만 받쳐입어도 그 자체로 빛이 날 것이다.

정당하게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노력의 대가로 얻은 부(富)를 눈치보지 않고 쓰면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의 벌어진 일련의 에피소드를 접하면서 우리의 시민의식이 좀 더 성숙하고 관대해져 가진 사람이 당당하게 쓸 수 있고, 없는 사람이 무시당하지 않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