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동과 광화문, 홍대에 있는 쇼핑 매장에서는 간단한 일어와 중국어 회화는 필수다. 평일과 비수기에도 쇼핑하러 몰려든 일본인, 중국인 관광객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2004년 TV 드라마 ‘겨울연가’에서부터 2012년 K팝까지 한류 열풍이 이어지면서 일본과 중국에서 한국을 찾는 관광객이 매년 늘고 있다. 한구현 한류연구소장은 “중국인과 일본인 관광객에게 설문조사 한 결과 80%가 한류의 영향을 받아 한국을 찾았다고 밝혔다”고 말했다.
이들을 잡으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특정 국가 관광객을 타깃으로 한 전용 매장도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롯데백화점이다. 롯데백화점 서울 소공동 본점은 올해 6월부터 11층 등에 중국인 관광객 전용 안내데스크를 설치하고 통역 요원을 배치했다. 7월
31일부터는 9층 행사장에 중국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전용 편집매장을 업계 최초로 신설했다. 이곳엔 주로 잡화나 식료품 등 중국인이 선호하는 선물용상품 700여개를 진열했다. 한국 전통문양의 액세서리나 어린이 한복, 한지공예품, 건삼, 한라봉 등이 있다. 매장 직원은 중국어를 구사하며 회사 측의 중국 고객 응대 관련 서비스 교육을 이수했다.
롯데백화점 본점 관계자는 “면세점 매장과 연결된 통로 쪽이라 유동 인구가 많아 백화점을 찾은 중국 고객이 자연스레 매장을 들르고 있다”며 “한달 간 매출액이 애초 목표의 220%에 이를 만큼 반응이 좋다”고 설명했다. 매장을 찾은 중국인 관광객 리우(54)씨는 “1~2개씩 가볍게 구매하기 좋은 상품들이 눈에 띄어 물건을 쉽게 고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본인보다 중국인 노려
롯데백화점은 이 편집매장을 상시 운영할 방침이다. 이는 과거 중국인 관광객들이 춘절과 국경절 등 이른바 ‘관광 특수 시즌’에만 편중됐던 것과 달리 연중 고르게 방문하는 추세가 강해진 데 따른 것이다. 단기성 이벤트나 프로모션만으로는 비수기 때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중국 고객을 잡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면세점업계도 이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정삼수 롯데면세점 중국 마케팅담당 팀장은 “예전엔 11월~3월에는 중국인이 덜 들어오는 비수기였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면서 “비수기에도 단체 관광객이 급증해 경품 행사나 감성 마케팅을 매 시즌 준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1~2년 사이 중국인 관광객의 면세점 방문이 크게 늘고 있다. 관세청 서울본부세관에 따르면 올해 1~7월 서울시내 면세점 6곳의국적별 매출 증가율은 중국인이 158%로 일본인(59%)에 비해 배 이상 높았다. 신라면세점의 올해 상반기 중국인 매출 비중은 52.6%로 1위였다. 작년 상반기만 해도 일본인 매출 비중이 중국인보다 높았다. 한구현 소장은 “아직까지는 일본인들이 국내를 찾는 관광객의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중국인 관광객 규모가 훨씬 더 커져 시장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분석했다.면세점 업계는 과거 중국인 관광객의 대부분이 명품 시계, 명품백 등 해외 상품을 찾는 중산층 이상이었다면 최근엔 중류층 이하까지도 많이 방문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소비 형태가 변화했다. 어필할 수 있는 상품들 저변도 국산으로 확대됐다.
한국산 전자제품, 주방용품이나 화장품 등 생활필수품을 찾는 중국인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정삼수 팀장은 “화장품의 경우 설화수나 아모레퍼시픽 등 대형 브랜드 외에도 미샤 등 중저가 패션 숍이 인기”라고 전했다. 특정 배우가 CF에서 쓴 상품을 보여달라는 문의도 많다.지역적으로는 서울 강남이 떠오르는 관광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예전에는 명동, 광화문, 신촌, 인사동 등에 비해 외국인을 끌어 들일 만한 역사적 장소나 볼거리가 적고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 선호도가 높지 않았지만 요즘은 다르다. 롯데면세점은 9월 코엑스점에 한류 전용관을 신설하고 월 2000명의 관광객 유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 관광지로서 강남권 인기가 높아져서다. 제상원 한국관광공사 한류관광팀장은 “드라마 배경으로 많이 등장했던 청담동 가로수길이 필수 관광 코스로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가로수길에 있는 피부미용숍이 인기다. 이유가 뭘까.
진수남 한국관광공사 의료관광사업단장은 “아시아권 관광객들이 한류 콘텐트의 영향으로 인기 여배우가 출연한 드라마를 많이 보고 K팝으로 소녀시대 등 걸그룹을 접하면서 ‘한국 여성이 예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여성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어서 한국에 와서 한국식으로 메이크업과 피부관리를 받거나 성형을 하는 여성 관광객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2011년 한 해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 의료관광객은 총 12만2297명으로 전년 대비 49.5%가 증가했다. 진료비 수익은 모두 1809억원으로 75.3% 늘었다. 이중 성형외과와 피부과가 차지한 비중이 전체의 12.1%로 작년 기준 2위였다. 내과(15.3%)를 제외하면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다.
최근에는 미국(27%), 일본(22.1%), 중국(18.9%) 외에 러시아(9.5%)에서도 의료관광객이 많이 유입될 만큼 ‘미용 한류’ 바람이 광범위하게 불고 있다. 이에 관련 프로모션도 늘고 있다. 현대백화점압구정 본점은 청담동과 압구정동 일대 피부과, 성형외과와 협력 관계를 구축해 관광객들한테 의료관광 상품과 백화점 상품을 동시에 소개하고 있다. 서울시내 유명 피부과와 성형외과들은 외국어 서비스를 같이 진행하고 있다. 여행사 성형 패키지도 유행이다.
연예기획사에 아이돌 보러 몰려
여기에 연예산업 분야가 외국인 관광객 증가에 일조를 하고 있다. 강남구는 올해 하반기 중으로 청담동 일대에 ‘한류 스타 거리’를 조성하고 본격적인 한류 관광객 유치에 나설 계획이다. 이곳엔 수퍼주니어와 소녀시대 등 한류 아이돌이 소속된 SM엔터테인먼트 본사, 2PM이 소속된 JYP 본사 등 크고 작은 연예기획사 300여곳이 밀집됐다. 강남구가 한류 스타 거리를 조성하는 이유는 적극적으로 본인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소속사를 찾으려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늘고 있어서다. 이곳엔 이미 하루에도 수십여 팀의 외국인들이 방문해 K팝 스타들을 기다린다. 중국과 일본 말고도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등 국적도 다양하다. 연예 관계자에 따르면 동방신기를 좋아하는 해외 팬들한테 있어 SM 본사는 ‘성지’다. 다른 기획사도 마찬가지다.
제상원 팀장은 한류가 ‘구체화’됐다는 말로 이를 표현한다. 종전엔 콘서트 관람 등의 소극적 참여가 관광 형태의 주를 이뤘다면 요즘은 한류 스타가 운영하는 가게를 찾거나 드라마 촬영지, 연예기획사 등을 직접 방문하는 적극적 참여가 늘었다는 설명이다. 제 팀장은 “관광객들이 인터넷 등으로 정보를 미리 찾아본 다음 목적을 갖고 오는 경우가 많다”며 “방송 3사 음악프로그램 공개방송 현장을 대규모로 찾는 관광객도 늘었다”고 말했다. 이밖에 인기 예능프로그램 ‘런닝맨’ 촬영지 등도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이처럼 호황을 거듭하고 있는 한류 관광이지만 일각에서는 관광한국이 지금처럼 한류를 중심으로 하되, 저변을 넓히는 길도 같이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구현 소장은 “마카오처럼 대단위 카지노 단지를 조성하는 등의 국가적 노력도 검토돼야 한다”고 했다. 외국인 관광객 방문지가 여전히 서울과 수도권에만 편중된 것도 개선돼야 할 부분이다. 관광공사 관계자는 “의료관광 분야에선 ‘성형관광’이라는 오점이 생기지 않게 이미지 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에서 건축 일을 하고 있는 관광객 다카다(35)씨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다녀왔는데 단순히 한류 관광 상품만 따라다니는 데서 벗어나 역사의 진실을 배우는 데도 도움이 됐다”며 “반짝하고 사라지는 아이템 외에 이런 의미 있는 명소들이 더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