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알고 있는, 그래서 예측 가능한 리스크를 막지 못해 파국을 맞는 경우가 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런 경우다. 부채로 쌓은 거품은 결국 붕괴한다는 상식을 누구나 알았지만, 아무도 멈추질 못했다. 세계 경제는 침체의 늪에서 5년을 헤맸다.
내년 한국경제는 누구나 다 아는 위험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향방이 갈릴 것이다. 더는 두고만 볼 수 없는 한국경제의 심각한 구조적 리스크, 바로 ‘빚’이다. 가계·기업·정부가 위태로운 블록 쌓기를 하듯 쌓아 올린 부채가 어느덧 약 3600조원(2013년 3분기)이다. 가계·비영리단체 1135조원, 기업 1982조원, 정부 476조원이다. 여기에 공기업 부채 약 500조원을 합하면 4000조원이 훌쩍 넘는다.
가계부채 1000조원 돌파한국경제사에서 ‘부채’는 양날의 칼이다.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지 국내 기업의 경우 300~400%대 부채비율은 기본이었다. 적극적인 차입으로 투자를 했고, 한국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대규모 재무 구조조정을 거친 끝에 기업 부채비율은 뚝 떨어졌다. 이를 대신한 것이 가계다.
기업 대출 장사가 막힌 은행은 가계 대출로 눈을 돌렸고 정부는 이를 적극 장려(?)했다. 가계는 쉽게 빌린 돈으로 주택을 샀고 소비를 늘렸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가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가 바로 가계 빚이다. 가계는 빚을 내 소비를 했고, 빚을 내서 빚을 갚았다. 하지만 곧 한도가 찼다. 2003년 신용카드 사태가 터졌다.
2006년 부동산 시장이 고점을 찍은 후로 가계 부채는 한국경제에 가장 무거운 짐이 됐다. 부채 상환을 우려한 가계는 소비부터 줄였다. 수출이 아무리 잘 돼도 내수 시장엔 좀처럼 온기가 돌지 않았다. 그게 우리나라가 저성장의 늪에 빠진 주된 이유 중 하나다. 노무라종합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경제의 성장률 저조는 외수면에서는 세계 경제 침체, 내수면에서는 2000년대에 걸쳐서 계속된 가계 부채 확대로 인한 성장 패턴에 한계가 나타난 것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가계 부채는 올해 10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9월 말 현재 992조원이다. 그중 절반 이상이 주택담보대출이다. 부동산 시장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부실 위험은 갈수록 커진다. 무디스는 11월 말 가계 부채 증가가 한국 금융회사에 부정적이라고 경고했다.
정부는 가계 부채 증가율이 완만해졌다고 하지만, 소득은 늘지 않고 부채는 증가하면서 가계 가처분 소득대비 부채 비율은 2010년 158%에서 올 상반기 169.2%로 증가했다. 특히 다중 채무자나 자영업 대출이 부실화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중신용·중소득 가계 부채가 증가하고 있는 것도 위험 요인이다. 또한 내년에는 전세자금 대출이 새로운 가계 부채 관련 현안으로 부각될 전망이다.
정부가 가계 부채를 급격히 줄이는 정책을 펴기도 어렵다. 많은 가계가 얽혀 있어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면서 경기가 악화될 수 있다.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가계가 버틸 수 있는 체력 범위 내에서 현실적인 가계 부채 구조조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저·중신용 가계에 대해서는 대출 상환 압박으로 어려움에 빠지지 않도록 정책 배려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한국경제 ‘부채의 덫’ 빠져기업도 부채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올해 이미 여러 대기업이 부채 문제로 수난을 겪었다. 내년에도 유사한 일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 중 통상 안정기준으로 보는 부채비율 200%를 넘는 기업은 100곳 중 19곳이나 된다. 부채는 많은데 돈은 못 번다. 부채 과다기업 중 55%는 적자 기업이다.
외부 충격이 올 경우, 직접적으로 위기에 노출되는 단기 차입금 비중도 매우 큰 상황이다. 우리 기업의 65%는 전체 부채 중 1년 내에 도래하는 단기 차입금 비중이 절반을 넘는다. 유동성 위기에 빠질 수 있는 곳이 많다는 뜻이다. 특히 내년에는 국내 은행들이 대기업 대출 태도를 더욱 강화할 것으로 보여 비우량 대기업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위험 부채 상황도 심각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법인세를 내기 전 이익으로 이자도 충당 못 하는 위험 기업은 전체의 30.8%다. 이들 기업이 보유한 부채 중 위기 때 갚지 못할 가능성이 큰 위험 부채 비중은 2010년 18.6%에서 올 상반기엔 33.9%로 급증했다.
현오석 기획재정부 장관은 11월 말 한 강연에서 향후 경제의 위험요인으로 가계 부채와 기업 구조조정 등을 꼽았다. 현 장관은 “가계 부채를 적정선에서 관리하고 한계기업에 대한 선제적 대응을 통해 기업 위험이 경제 전반의 시스템 위험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미뤄온 기업 구조조정이 내년에 진행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정부 빚도 걱정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우리 정부는 신속하고 과감한 재정 집행으로 더 큰 위기를 막았다. 하지만 정부 재정건전성은 그만큼 나빠졌다. 향후 예상치 못한 경제위기가 오면, 정부가 재정으로 막을 수 있는 여력은 예전보다 훨씬 줄었다. 미국·유럽·일본이 장기 침체를 겪은 이유 중 하나도 정부 재정 문제였다. 명지대 조동근 경제학부 교수는 “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이 높을수록 경제성장률이 평균적으로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우리나라 국가 채무가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올해 국가채무는 420조원으로 GDP 대비 36% 정도다. 하지만, 국가채무에 국가보증부채·장기충당부채·한국은행 통화안정증권잔액 등을 포함하는 국가부채는 1413조원에 달한다. GDP 대비 106.5%다.
특히 적자성 채무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적자성 채무는 국민 부담으로 상환해야 하는 국가 채무를 말한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적자성 국가채무는 2007년 127조원, 2010년 193조원, 올 10월 현재 246조원으로 급증했다. 이 역시 국가부채 개념으로 보면, 올해 적자성 국가부채는 996조원, 내년에는 1146조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오정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내년에 적자성 국가부채가 GDP 대비 80%를 넘어 이자 지급을 위해 국채를 발행해야 하는 부채의 덫에 빠질 우려가 커지고 경제 운영에 부담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 교수는 “정부가 성장 촉진, 공기업 개혁, 공무원·군인연금 개혁을 통해 부채를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재정적자 문제가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일시적 선택이 아니라 만성적인 현상을 보인다”며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 재정지출을 합리적으로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