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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민 인생2막] 고단한 노년의 삶을 개혁 하라

도일 남건욱 2006. 9. 22. 17:48
[은퇴이민 인생2막] 고단한 노년의 삶을 개혁 하라
제3국에서 월 200~300만원으로 풍요로운 제2의 인생 시작… 현지 총력 취재

생존을 위해, 가족을 위해 그동안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던가? 이제는 평생을 짓눌러왔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싶다. 비록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각종 성인병이 몸을 위협하고 있지만 마음만은 훨훨 날고 있다. 이제 들꽃처럼 자유를 만끽하는 곳으로 떠나자. 아무런 속박 없이 언제라도 창공을 향해 골프채를 휘둘러보자. 이코노미스트는 취재진을 총 동원, 노년의 삶을 개혁하기 위한 은퇴이민을 기획했다. 풍요로운 인생 2막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정년퇴직이 내년으로 임박한 50대 중반의 가장 K씨의 마음은 늘 무겁고 쓸쓸하다. 가끔 차를 몰고 교외에 나가면 그는 자연으로부터 그나마 위안을 받게 된다.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이 거대한 산 그림자 사이를 흐르는 모습을 볼 때,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절감하게 된다. 초록 물고기의 비늘 같았던 신록이 비단 같은 단풍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바라보며 그는 이렇게 독백한다.

“자연은 저렇게 아름다운데 삶은 왜 이토록 번잡하고 고단한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던 지난 수십 년간의 삶을 되돌아본다. 삶이 고단했던 것은 지독한 경쟁을 성공과 성장의 자양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고, 집을 장만하고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행복해지기 위해 고단한 삶을 선택했지만 막상 행복은 찾아오지 않았다.

휴가를 맞아 산과 바다를 찾을 때도 그는 휴가 후의 업무에 관해 골똘히 생각했다. 경영과 처세술에 관한 책을 휴대하지 않고는 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 그에게 휴가는 성공을 위한 전술 탐구 기간, 지칠 대로 지친 육체와 정신을 위한 최소한의 휴식에 불과했다.

서울 강북에 48평짜리 아파트 한 채, 예상되는 퇴직금 약 3억원, 2년 전 대학 졸업 직후 시집간 큰딸과 올해 초 서울 소재 대학에 간신히 입학한 막내 아들의 존재가 두 손에 쥔 ‘인생 성적표’의 전부다. 아름다웠던 아내는 이마와 목에 주름이 잔뜩 생겼고, 40대 중반부터 얻은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다. 실패도 성공도 아닌 고만고만한 삶의 모습…. 이게 그가 경영해온 인생의 실상이다.

되돌아보건대 그는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 그러나 “가족을 위해 살았다”는 위선에 가까운 말로 지나간 삶을 포장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부터라도 ‘생의 본질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라 해도 좋고, ‘느릿느릿한 템포 속에서의 삶’이라고 해도 좋다. 평생을 짓눌렀던 자본주의 시스템, 경쟁, 체면, 과로, TV 뉴스의 공해, 과도한 책임감, 나쁜 공기, 소음, 부당한 음해에서 벗어난 삶이라 해도 좋다.

골프만 해도 그렇다. 20년 이상 골프를 치면서 그는 골프야말로 인간이 개발한 최고의 유희라는 점을 절감했다. 골프를 ‘종교적 체험’에 비교하는 매니어도 있지만 골프 코스가 신과 연결되는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 최고의 유희를 어떻게 하면 질리도록 즐길 수 있을까를 꿈꿔왔다. 접대를 하거나, 접대를 받지 않으면서…. 그리고 비용을 걱정하지 않으면서…. 치기 싫은 사람과 억지로 내기를 하지 않으면서….

그는 “플레이의 진정한 기쁨은 하나하나의 샷이 준 난제를 해결하려는 지적(知的) 과정에 있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다. 똑같은 샷을 두 번 다시 할 수 없다면 응당 샷 하나하나에 정신을 집중해야 하리라. 그는 이것이 바로 생의 본질 속에 자신을 담그는 길이란 것을 최근에야 깨닫게 됐다.

K씨에게 생의 본질이 골프 샷에 집중하는 것에만 있지 않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독서할 때는 독서만을, 수영할 때는 수영만을, 승마할 때는 승마만을 생각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게 된 본질적인 삶의 양상이다. 지난 수십 년간 습관처럼 해온 자식들에 대한 걱정도 이제 뚝 끊으리라. 성인이 된 자식들을 위한 노심초사가 결국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K씨가 동남아로의 은퇴 이민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된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의 변화 때문이다. 그는 내년 초 정년 퇴임과 동시에 필리핀 또는 말레이시아로 이민가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그 프로젝트의 원칙은 세 가지다.

▶들꽃처럼 자유를 만끽하고, 삶의 진실한 국면에 자신을 내던질 것.
▶최후의 정착지란 생각을 버리고 변화와 모험을 즐길 것.
▶최대한의 정보 수집과 철저한 준비로 불필요한 불편과 고통을 줄일 것.


지난 25년간 서울에서 법무사 사무실을 운영했던 P씨(54)는 최근 필리핀으로의 은퇴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 그가 구상하는 이민의 컨셉트는 ‘낭만적 황혼 이민’이다. 동남아 은퇴 이민 역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고, 환상을 품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다.

그러나 P씨는 몇 번의 필리핀 여행에서 얻은 정보를 통해 쪽빛 물결과 야자수가 어우러진 해변의 그림 같은 집에서 골프와 수영, 승마를 즐길 꿈이 결코 환상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현지 탐사를 통해 ‘휴가 같은 황혼’을 계획한 P씨 부부는 필리핀의 싱싱하고 풍부한 해산물, 매혹적인 열대 과일의 맛을 잊지 못한다. 더위에 적응만 되면 열대의 원시성과 저렴한 문화, 레포츠 시설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저비용·고품질 삶 위한 엑소더스

필리핀은 지난 5월 영주 비자 신청에 필요한 필리핀은행 예금액을 50세 이상의 경우 5만 달러에서 2만 달러로 낮췄다. 2000만원 정도만 있으면 영주비자가 나온다는 얘기다. P씨가 생각하는 부부의 생활비는 월 200만원 정도. 한 달에 10회 이상의 골프 피와 가사 도우미, 운전기사의 월급이 포함된 액수다. 한 달에 고작 2~3일 정도만 쉬는 가사 도우미의 월급이 6만~8만원 정도, 운전기사 월급도 10만원이면 오케이다.

은퇴 이민은 본질적으로 적은 돈으로 고품질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엑소더스다. 서울보다 압도적으로 싼 상품과 서비스, 주택과 레저시설을 즐기면서 노후를 새로운 차원으로 설계하는 행위다. 창의적인 발상으로 노년의 인생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모험심도 필요하다. “노인이 말도 안 통하는 더운 나라에서 어떻게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느냐”고 걱정하는 쪽이라면 은퇴 이민의 꿈은 접는 편이 낫다.

예컨대 뉴질랜드령 피지는 서울에서 8000km나 떨어진 태평양상의 섬이다. 이곳은 주택 임차비용, 쌀과 육류, 채소 등 기본 생활비가 국내에 비해 엄청나게 저렴하다. 주택 임차비와 쌀값은 한국의 4분의 1 수준이고, 쇠고기는 1kg에 4000원 정도지만 그 품질은 한우 고기를 능가한다.

1년 내내 골프장을 이용해도 비용은 20만~30만원 정도에 그친다. 매달 200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쓴다면 월수입 800만원을 올리는 사람의 서울 생활에 맞먹는 질을 향유할 수 있다. 물론 피지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맑은 공기는 덤으로 따라오는 혜택이다.

그러나 저비용·고품질의 은퇴 이민을 원하는 사람들은 대상지의 물가 수준을 철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피지의 경우도 공산품 가격, 통신 비용 등은 한국에 비해 월등히 높은 편이다. 가전제품과 가구가 딸린 집을 얻으려면 상당한 비용이 추가된다. 필리핀, 태국 등과 함께 은퇴 이민지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말레이시아의 경우도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생활비는 서울 못지 않은 수준을 유지한다. 살기가 편리한 대신 높은 생활비를 감수해야 한다는 얘기다.

저비용, 고품질은 은퇴 이민자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되기도 하지만 그 둘을 완벽하게 만족하는 지역은 그리 흔치 않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생활비가 아무리 저렴해도 공기와 물 같은 자연조건, 교통과 통신 여건, 문화 인프라, 치안 등의 요소가 불완전하다면 일단 배제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민자 개개인의 취향과 여건이 깊이 있게 고려돼야 한다.

예컨대 건강에 자신 없는 은퇴자가 피지를 이민지로 선택할 경우 예기치 못한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피지는 의약품이 풍부하고 의료비가 거의 무료에 가깝지만 의료 기술은 타지에 비해 매우 낙후돼 있다. 정기적인 진료와 급작스러운 수술이 예상되는 이민자는 피해야 할 땅이다.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을 고르고 또 고르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은퇴 이민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노후를 새롭게 설계하는 행위다. 발상의 전환과 도전, 창조적인 모험심이 전무하다면 시도하기 어려운 삶의 방식이다.

적당한 긴장을 통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노력 없이는 은퇴 이민은 성공하기 어렵다. 결단을 통해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그렇게 얻은 삶의 방식을 느긋하게 즐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은퇴 이민은 노년의 장기 관광

은퇴 이민은 항구적이고 영속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다. 청장년 시절에 떠나는 취업, 투자 이민과는 다르다. 대부분의 은퇴 이민지는 비즈니스를 통해 돈을 벌기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안정적인 소득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스페인은 지난 10년간의 경제 성장에 힘입어 유럽에서 가장 이민자가 많이 몰려드는 ‘이민 대국’이 됐다. 지난해 스페인에 들어온 외국 이민자는 65만 명이다. 지난 6년간의 이민자 숫자는 290만 명에 달한다. 지난 5년간 유럽연합(EU) 전체에서 창출된 일자리의 절반이 스페인에서 생겨났기 때문. 이 일자리가 거대한 이민 인구를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됐다.

스페인 최대 경제 도시 바르셀로나 일대는 이민자의 25%가 정착한 곳이다.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주(州) 정부의 주된 관심사도 이민정책이다. 최근 확정된 카탈루냐주 헌법 개정안에 따라 스페인의 17개 자치주 중 유일하게 독자적으로 이민자를 관리할 권한을 중앙 정부로부터 위임받았다.

급증하는 이민 인구는 스페인의 인구 지도를 바꿔놓았다. 전체 인구에서 이민자 비중은 8.7%(약 370만 명). 출신 지역도 남미(120만 명), 북아프리카 모로코(53만5000명), 영국(27만4000명) 등으로 다양하다. 지난 10년간 스페인 경제를 이끌어온 주축 산업이 건설 및 관광인데 이는 외국 이민자를 빼놓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브라질, 에콰도르 같은 남미 국가나 북아프리카 모로코, 동유럽 등지에서 온 이민자들은 건설 현장이나 호텔·음식점·옷가게 등의 서비스 업종에서 주로 일한다.

동남아로 떠나는 한국의 은퇴 이민자들은 스페인으로 가는 영국 이민자가 그 모델이다. 영국에서 온 사람들은 스페인의 따뜻한 햇살 속에 노년을 보내려는 은퇴 이민이 주를 이룬다. 얼마 전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27만4000명의 영국 이민자 외에 매년 50만 명의 영국인들이 스페인에서 몇 달씩 보낸다”고 보도했다. 이들이 집을 구하기 위해 가져온 돈이 스페인의 건설 경기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일본인들이 전 세계를 향해 장기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세금과 이자 때문이다. 일본의 개인 금융자산은 1500조 엔 규모다. 은퇴하거나 은퇴를 앞둔 50대 이상이 78%를 보유하고 있다. 이자는 연 0.1%(보통예금 기준). 1억 엔을 예금하면 일본에선 연간 10만 엔을 이자로 받지만 뉴질랜드에선 700만~800만 엔을 받는다. 반면 일본의 소득세와 상속세는 최고 50%다. 그래서 많은 수의 일본인 퇴직자가 뉴질랜드를 비롯한 세계 각지로 ‘영원한 여행’을 떠난다.

‘영원한 여행자(Perpetual Traveler)’란 유럽의 부자들이 자국의 높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낮은 세금을 부과하는 나라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말한다. 일본에서 내년부터 3년간 정년퇴직을 하는 단카이(團塊) 세대는 810만 명에 달한다.

이들의 퇴직금만 50조 엔으로 추정된다. 일본 기업만 이 돈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대만은 지난 2월 일본 정년퇴직자를 대상으로 180일간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만들었다. 필리핀 역시 지난 5월 영주 비자 신청에 필요한 필리핀은행 예금액을 50세 이상의 경우 5만 달러에서 2만 달러로 낮췄다. 말레이시아는 장기체류 비자 갱신 기간을 5년에서 10년으로 늘렸다.

노년층의 ‘일본 이탈’은 부유층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국가 재정 고갈로 연금이 줄어들면서 생활비가 싼 동남아로 주거지를 옮기는 중산층 이하 노년층도 함께 늘고 있다. 일본에선 이들을 가리켜 ‘연금(年金) 이민’이라 부른다.

그러나 일본의 연금 이민과 우리의 은퇴 이민은 그 성격이 다르다. 우리는 여전히 ‘식구문화’의 강력한 영향 아래 살고 있다. 가족들이 가까운 곳에 모여 ‘지지고 볶고’ 사는 문화는 한편으로는 거추장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정신 건강에 유익하다. 가끔은 떨어져 살아도 좋지만 영원히 떨어져 살면 안 되는 것이 우리의 ‘식구문화’다.

우리의 독특한 ‘식구문화’는 은퇴 이민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은퇴 이민의 적지로 예컨대 태국의 치앙마이를 선정했다 해도 말 그대로 그곳은 ‘잠시 나가서 사는 곳’ 쯤으로 생각하는 편이 좋다. 장기 관광여행을 떠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치앙마이에 뼈를 묻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원없이 칠 수 있는 골프나 아름다운 자연환경도 지겹고 단조로운 일상사로 변질되기 쉽다.

은퇴 이민을 간다 해도 서울과 가까운 동남아 지역 등에 살며 항상 가족과 친지, 친구들과 연락하고 살아야 한다. 동남아에 멋진 별장을 지닌 채 한국과 이민지의 장점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생활 패턴을 구축하라는 것이다.

지난 2004년 필리핀 천혜의 휴양지 바기오에 은퇴 이민한 정수민씨(가명) 부부의 라이프 사이클이 바로 그렇다. 2남1녀인 자녀를 모두 출가시킨 정씨 부부는 겨울 등 혹한기를 피해 7개월 가량을 이곳에서 생활하며 1년에 한두 차례 한국에 다녀온다. 자녀와 친지,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정씨 부부는 필리핀 바기오 지역이 “기후가 따뜻하고 생활비도 싼 점이 매력”으로 설명한다. 한 달에 260만원 정도의 생활비로 가사 도우미를 두고 골프 등 여가생활까지 즐길 수 있어 매우 만족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바기오에 있는 콘도 한 달 임대수익 110만원과 한국에서 송금되는 개인연금 150만원을 합쳐 생활비를 조달한다.

최근에는 바기오에 있는 존헤이 골프장 회원권을 700만원 정도에 저렴하게 구입해 마음껏 골프를 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들 부부의 필리핀 생활이 활력이 넘치는 이유는 서울과 바기오를 오가는 리드미컬한 생활 패턴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은퇴이민은 정착이면서 방랑이며, 방랑을 전제로 한 정착이다. 장시간의 여행을 통해 깨달음과 통찰을 얻을 수 있다면 은퇴 이민은 하나의 아름다운 수행 과정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