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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나라마다 “의료 관광객 잡아라”

도일 남건욱 2006. 9. 22. 18:00
EU, 나라마다 “의료 관광객 잡아라”
값싸고 빠른 서비스 원하는 ‘국경 없는 환자들’에게 손짓

국민 의료보장제도 혜택을 받는 영국 국민들도 빠른 진료를 받기 위해 프랑스로 원정 진료를 나간다.

‘국경 없는 의사’라고 하면 왠지 고상해 보인다. 국적과 인종을 떠나 넓은 마음으로 의료 봉사를 하는 의사를 가리키는 말 같다. 실제로 전 세계 분쟁·재난·빈곤 지역에 자원 봉사 의료진을 파견해 인도주의적 지원을 함으로써 칭찬받고 있는 ‘국경 없는 의사회’라는 단체도 있다. 1971년 프랑스 의사들이 만든 이 단체는 프랑스어 약자인 MSF (Medecins Sans Frontieres)로 잘 알려져 있다. 영어권에선 같은 뜻의 영어인 ‘Doctors without borders’로 쓰기도 한다.

하지만 ‘국경 없는 환자들’이라고 하면 어감이 사뭇 다르다. 국경을 넘어 ‘의료 관광(health tourism)’을 하러 다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같아서다. 유럽연합(EU)이 이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고 파이낸셜 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자기 나라보다 더욱 고급스럽고 보다 수준 높은 고가 의료 서비스를 찾아 국경을 넘는 ‘명품 의료 관광객’ 때문만은 아니다. 의료 분야에서 최근 EU의 가장 큰 고민은 환자들이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역내 국경선을 넘어 더욱 값싸고 바로 진료가 되는 등 서비스 좋은 나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EU는 아직 의료 체계는 통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끼리 서로 다른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부문별 의료 서비스 수준과 가격이 서로 차이가 난다. 그 차이를 발견한 환자들이 보다 값싸고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찾아 국경을 넘고 있는 것이다. 상품과 사람 이동에 제한을 거의 없애 버린 EU에서 이런 행위는 불법이 아니지만 여러 문제를 낳고 있다.

FT가 소개한 예를 하나 보자. 고관절 이상으로 고생하던 75세의 영국 여성 이본 워츠는 최근 프랑스로 가 고관절을 인공관절로 대체하는 수술을 받았다. 워츠가 남의 나라로 가서 수술을 받은 데는 이유가 있다. NHS(National Health Service)라는 이름의 국민 의료보장제도를 운영하는 영국에선 의료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

하지만 재정 부담을 우려한 정부에서 투자를 많이 하지 않아 응급이 아닌 큰 수술을 받으려면 환자가 상당 기간 기다려야 한다. 영국에선 대기 환자가 밀려 워츠가 수술받으려면 1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통증과 불편을 참지 못한 워츠는 프랑스로 건너가 자기 지갑에서 5800유로(약 710만원)를 내고 수술받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워츠는 NHS가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 부당하게 수술이 지연되는 바람에 자신이 외국에서 수술을 받느라 적지 않은 개인 돈을 썼다며 그 돈을 물어내라고 NHS에 소송을 낸 것이다.

이 사건을 맡은 유럽사법재판소(ECJ)는 최근 “진료가 부당하게 지연된 환자는 다른 곳에서 치료를 받을 권리가 있지만 1년 정도는 부당한 지연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워츠에게 수술비를 돌려줄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어느 정도가 부당한 지연인지는 정하지 않았다. 사건은 이걸로 마무리됐지만 유럽 각국은 또 다른 소송에 대비해 질병별, 환자 연령별 ‘부당한 지연’의 범위를 산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의료산업 측의 시각은 다르다. 의료 관광 붐을 비즈니스 기회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치과 진료나 성형외과 수술 등 비용이 많이 드는 진료의 경우 스페인·폴란드·헝가리 등이 이미 인접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 등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판촉 활동을 벌이고 있다. 유럽에 의료 비교우위 교역이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의료계가 유심히 살펴야 할 대목이다.
채인택 기자 (ciimccp@joongang.co.kr [855호] 2006.09.11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