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박사님이 읽은 책

공병호씨가 정리한 병자호란 이야기

도일 남건욱 2008. 4. 28. 20:04
한국사를 읽다보면 유독 가슴 아픈 대목들이 등장합니다.
작가 김훈은 <남한산성>이란 작품을 통해서 인조가 강화도로 미처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가는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병자호란을 전후해서 성 밖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주돈식 씨가 쓴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라는 책이 그 실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1. 병자호란(1636년: 인조 14년)보다 9년 앞서 있었던 정묘호란(1627년)은
누르하치가 죽고 후계자가 된 홍타이지가 50만의 후금 인구를 최대한 활용하여
대륙과 반도를 점령하려는 야망을 시험해 본 전쟁이었다. 정묘호란의 가장 큰
수확이라면 전쟁 45일만에 군대의 희생없이 5천 명의 포로 노예를 확보한 것이다.

그들은 평양에서 2천 명을 비롯하여 강동, 숙천 등의 마을에서 포로들을 잡아갔다.
특히 잡혀온 조선 노예들은 농사일을 잘했고, 조선 여자들은 아이를 잘 낳았다.
선왕 누르하치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인구 부족 문제를 짧은 시일 안에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에 충분하였다.

홍타이지는 이번에 정묘년보다 규모를 몇 배 늘린 노예잡이 전쟁을 다시 한번
벌이기로 했다. 그는 수년간 조선의 군사 대비 등 동정을 은밀히 살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금군의 훈련과 이들이 타고 갈 말을 조련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한탕'의 기회가 오기만을 호시탐탐 노린 것이다.

2. 1636년 12월 13일 이른 아침, 한 통의 장계가 조정에 도착했다.
'청군이 8일 국경을 침입, 안주에 이르렀음.'
조선은 '청나라가 침입했다'는 말 한마디에 나라의 기능이 마비된 듯했다.

수도 한성을 지키는 군대는 싸움을 한 번 못하고 사라졌고, 다른 군대라도 동원해서
막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임금조차도 싸워 물리치려는 의지가 없고
빨리 도망치려는 생각뿐이었다.
임금을 비롯한 모든 조선인에게 사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3. 밤 열시경 인조가 어렵게 남한산성 남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갔을 때
인조의 대가는 태복시 관원들이 다 도망쳐 너덧명만이 호송하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손수 말고삐를 잡고 와야 했다. 일반 대신들의 경우는 더욱 말이 아니었다.
말을 탈 수 있는 대신은 타고, 그렇지 못한 대신은 걸어서 백성들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갔다. ... 조선이 국가다운 국가였다면 수도까지 진군해온 적고 협상을 할 것이
아니라 그 군대를 쳤어야 했다. 조선은 울안에 들어온 도적과 협상을 한 셈이다.
(마부대가 이끄는 6천 명이 선발대는 추위와 굶주림을 참고 청나라 선양에서
조선의 한성까지 3천 여리를 달려온 뒤 후속 부대를 기다리기 위해 최명길이
주도한 회담에 응하게 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4. 12월 29일, 청태종이 전선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점검한 것이 포로수였다.
"최소한 오십만 명을 넘기라"는 그의 엄명에 청군들은 1월 1일 새해 다례와 친척
방문길에 오른 사람들까지 대대적으로 잡아들였다.

5.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얼마나 무참하고 비정하게 조선 포로를 잡아 갔는지는
3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시골에서 아이들이 울면 부모들은 "뙤놈 온다, 뙤놈, 뙤놈이 잡아간다'라고 위협하며
달랜다. '뙤놈'은 '되놈'을 강하게 발음한 것인데, 이때 되는 오랑캐, 즉 청국인을
뜻한다.


6. 주화론을 주도한 최명길은 <지천집>에서 "청군이 조선 왕의 항복을 받고
2월 15일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힌 인구가 무려 50만 명이었다고 했다.(당시 조선
인구 총수는 1천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또 남한산성에서 처음부터 항복할 때까지 왕을 모시고 있었으며, 관향사로 식당과
부식을 조달한 나만갑은 산성의 모든 일을 상세히 기록한 <남한일기>에서
"뒷날 선양에서 속환한 사람이 60만 명이나 되는데, 몽고 군대에서 포로가 된 자는
포함되지 않았다니,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없다"고 했다.
(* 책을 읽으면서 정묘호란이라는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9년 동안 조선 조정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였습니다만, 다음에는 정묘호란 전후의 이야기를
한번 읽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준비없는 국가, 대책없는 국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처: 주돈식, <조선인 60만 포로가 되다: 청나라에 잡혀간 조선 백성 수난사>, 학고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