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淸論濁論] 공포의 경제학

도일 남건욱 2008. 6. 5. 21:01
[淸論濁論] 공포의 경제학
열자의 천서편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몸 둘 곳이 없다는 두려움에 빠져 식음을 전폐한 ‘기(杞)’나라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않아도 되는 근심을 이르는 “기우(杞憂)”의 유래다.

지난 10년간 광우병에 걸린 사례가 한 건도 없다는 미국산 쇠고기를 놓고 광우병 논쟁을 벌이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군상과 중국 고서에 등장하는 기나라 백성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한판의 소극을 보는 것과 같다.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은 광우병에 걸릴 확률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지만 우리는 태연히 운전대를 잡는다. 말라리아의 위험이 높은 열대지방의 여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흡연 인구도 여전히 많다. 위험과의 공존은 삶의 양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통계적으로 인간에게 감염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광우병은 왜 이렇게 문제가 되고 있는가. 공포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운전은 안 하면 되고, 열대지방으로의 여행도 자제하면 된다. 담배도 끊으면 된다. 많은 위험은 실천 여부와는 관계없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쇠고기에는 광우병의 표시가 없다. 감염 여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일단 시식했을 경우 광우병 발생 여부는 우리의 통제 범위 밖에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은 발생 확률과 관계없이 우리를 공포에 떨게 만든다.

실재하지 않는 귀신을 무서워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공포가 몇몇 예민한 사람의 기우로 끝나지 않고 집단 히스테리로 돌변할 경우 경제 및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다. 하늘이 무너질까 두려워 식음을 전폐하면 그 결과는 빤하지 아니한가.

경제 현상 중에는 냉철한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 지배하는 심리에 의해 결과가 좌우되는 경우가 있다. ‘탐욕’과 ‘공포’의 사이클에 의해 자산 가격이 급변하는 금융시장은 대표적인 예다.

작년부터 세계경제의 암운으로 작용하고 있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시장참가자들이 유동성 축소와 주택시장 과열에 겁을 먹고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발생했다.

2000년대 초중반 서브프라임 관련 자산 가격이 상승할 때는 욕심에 눈이 멀어 가격 하락이 보이지 않았다. 지속적 가격상승을 기대하며 많은 투자자가 동참했다.

그러나 일정 시점이 지나자 높아진 가격에 모두들 불안했다. 유동성 축소와 주택시장 부진은 이러한 심리에 불을 질렀다. 불안이 공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매입에 몰렸던 세력이 매도 세력으로 돌변하고 자산 가격은 폭포수같이 하락했다.

하락 장세에는 매수자를 발견하지 못해 시장 균형 가격 자체가 형성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공포가 시장을 지배할 때는 자산의 내재가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소용이 없고 옥석도 가리지 못한다. 그저 관망하는 수밖에 없다.

최근 2년간 급변동을 거듭하고 있는 원화 환율의 움직임도 배후에는 군집심리가 작동하고 있다. 원화 환율이 하락할 때는 너도나도 선물환을 매도해 하락을 부추겼다.

반대로 상승기에는 모두가 지속적 상승을 기대해 달러를 매집한다. 오를 때는 지나치게 상승하고 내릴 때는 지나치게 하락하는 오버슈팅 현상이 발생해 경제가 고통을 받고 있다.

공포는 이성이 힘을 회복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심리가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 현상과는 달리 광우병은 우리가 두려워한다고 해서 발병하는 것이 아니다. 교포를 포함한 3억 미국인이 주식으로 먹고 있는 쇠고기가 한국인이 무서워한다고 해서 한국인에게 발병하는 것이 아니다.

광우병에 대한 과학적 사실을 꾸준히 알리고 미국산 쇠고기를 먹기 시작하면 공포는 안심으로 바뀔 것이다. 광우병 논란이 식품 안전에 대한 경고로 작용해 우리의 식생활 문화 개선에 긍정적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홍순영 삼성경제연구소 공공정책실장·상무 (serihsy@seri.org.kr [940호] 2008.06.02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