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지 기업도 보수적 경영으로 선회 … 사채시장은 중소기업들로 북적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다
금융위기로 실물경제가 나빠져 수출업체의 공장 가동률도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
지난 10년간 급성장한 A그룹 회장은 10월 중순 갑자기 모든 계열사 임원을 아침에 소집했다. 해외에 나가 있는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참석하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바로 전날 저녁에 연락을 받아 다들 선약을 취소하고 참석한 조찬 미팅에서 회장은 “불필요한 사업 진행을 최대한 줄이고 현금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비교적 유동성이 풍부하고 현금성 사업을 하는 주력사가 있지만 회장은 “상황이 간단치 않다”고 말했다. 요즘 대기업 계열사 CEO와 기획담당 임원들은 외부 약속을 못 잡는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금융시장 때문에 내년 사업계획을 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국내 30대 그룹의 한 계열사 사장은 “나빠진 금융환경과 이에 따른 소비심리 악화로 내년 계획을 세우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룹에서는 내년 사업 목표를 높이라고 하고 계열사에서는 현실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어 사업계획을 세우는 데만 몇 차례의 회의를 해야 할 지경이다. B그룹은 이미 회장이 “현금 확보를 최우선으로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비단 두 그룹뿐 아니라 대부분 기업에서 지금 가장 강조하는 것은 ‘현금 확보’다.
4대그룹의 한 금융 계열사 관계자는 “지금 밖으로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모든 회사가 사실상 비상 경영”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10대 그룹 임원은 “지난 10월 초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회장이 현금을 확보하고 불요불급한 투자 외에는 가급적 자제하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국내의 한 대기업 소속 대형 제조업체 역시 원가절감, 비용절감에 나서는 등 긴축 경영을 시작했다.
특히 이번 금융 위기의 직접적 피해자인 증권업계는 그동안 보유해 왔던 골프장 회원권을 일괄 매각하는 등 비용을 줄이고 유동성을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 증권사 임원은 “한 대형 증권사에서 골프장 회원권을 일괄 매각해 100억원 정도 실탄을 확보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굴지의 대기업들조차 현금확보에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아직까지 상반기 실적이 괜찮고 금융위기와 관련된 본격적인 경기침체가 오기 전이지만 기업들은 내년의 불확실한 상황에 대비해 미리 실탄을 준비하고 있다. 4대 그룹의 한 계열사 관계자는 “회사채나 기업어음(CP) 발행이 전면 중단돼 은행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은행마저 대출 문을 좁히고 있다”며 “대그룹 계열사인데도 연초 대비 2%포인트 이상 오른 금리에 돈을 빌리고 있다”고 말했다.
중견 그룹이나 건설사들은 은행 대출도 여의치 않다. 자금난에 몰린 은행이 여신을 연장해 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업들이 벌써부터 몸을 사리는 이유는 내년에 미국 경기가 본격적으로 악화되고 한국의 주력 사업인 반도체, LCD, 휴대전화, 자동차 등 대미 수출기업의 실적이 저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 때문이다.
그때 가서 자금 악화설에 시달릴 것에 대비해 미리 현금을 확보하는 전략이다. 하지만 이런 속사정을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어렵다. 안 그래도 극도로 악화된 투자심리에 루머가 난무하는 주식시장에 자금 악화설이나 비상경영 소문이 확산될 경우 공연히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비상경영 ‘쉬쉬 하는 기업들’
정부서 ‘위기 조장하지 마라’ 사인
1929년 대공황과 맞먹는 역사적인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국내 대기업 중 ‘비상경영’을 선언한 곳이 없다. 종합주가지수는 5개월 만에 40% 가까이 추락했고, 환율은 하루에 133원 오르는 등(10월 16일)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한국의 주요 수출시장인 미국의 경기도 급전직하하고 있다. 이미 수출기업들은 타격이 시작됐고, 금융위기로 시중 금리가 올라가는 등 경영환경은 급속히 나빠지고 있다. 이쯤 되면 ‘비상경영 선포식’이라도 했어야 할 기업들이 왜 이리 조용할까? 일부에서는 오히려 지금은 위기가 아니라고 진정시키기까지 하고 있다. 한 대기업 CEO는 “이미 내부적으로는 비상경영 체제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는 “해외출장도 불요불급한 것은 줄이고, 계열사 CEO들이 알아서 골프를 자제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고 귀띔해 줬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사무실에 전등까지 하나씩 줄이는 정도인데 비상상황 아니냐?”고 되물었다. 또 다른 국내 대기업 부장도 “이미 몇 달 전부터 비용을 줄이고, 경비절감 방안을 내는 등 사실상 축소경영에 돌입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은 밖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정부에서 위기 상황을 조장하지 말라는 사인을 보내고 있는데 누가 먼저 나서서 총대를 메겠는가?”라고 물었다. 또 다른 임원은 “증시가 워낙 안 좋으니 위기에도 위기라고 말하기가 두렵다”고 말했다. 자칫 부도기업으로 몰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다 보니 큰 기업들은 엉뚱한 고민이 생긴다. 과거처럼 비상경영을 공표하고 임금 동결 선언이라고 해야 하는데 조용, 조용히 일을 추진하다 보니 노조가 강하게 버텨 쉽지 않다. 비상경영을 선언하자니 정부의 눈치가 보이고, 가만 있자니 당장 내년이 걱정인 셈이다. |
자산 내놨지만 팔리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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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이 급등한 것을 알고 있으니 수출 가격을 내리라’는 게 전자우편의 골자. 안 그래도 올해 대미 수출실적이 반 토막 난 상황인데 환율 급등에 따른 ‘반사효과’도 포기해야 할 판이다.
C사의 곳간은 텅 비어 있다. 지난해 말 키코(KIKO)에 가입했다가 100억원이 넘는 환차손을 입었다. C사의 재무담당 이사는 “신용도가 바닥인 상황에서 수출계약마저 결렬되면 우리 회사는 생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 곳간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유동성 위기를 피하기 위해 밑지는 수출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다.
건설업체인 D사는 지난 10월 초, 대출 연장에 실패했다. ‘대규모 분양에 실패했다’는 소문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D사는 ‘연 11%의 금리를 주겠다’고 설득했지만 은행 담당자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했다. 돈줄이 막힌 D사는 유휴자산 매각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장기 미회수 채권에 대한 회수작업도 추진하고 있다. 게다가 사채시장까지 기웃거리고 있다.
D사 대표는 “건설경기도 부진한데 글로벌 경제위기까지 불어 닥치면서 건설업체들의 돈줄은 완전히 말라 버렸다”며 “(내가) 사채시장의 문턱까지 넘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폭풍’에 중소기업은 하루하루 버티기조차 힘에 부친다. 중소기업들이 현금 확보에 열을 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장 써야 할 돈이 없어 ‘흑자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현금 확보는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금융기관들은 대출은커녕 ‘비 오는데 우산 뺏는’ 식으로 자금회수에 나서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중소기업 대출 증가액은 올 2분기 6조5000억원에서 3분기 3조9000억원으로 40%가량 감소했다. 금융시장이 악화되자 은행들이 만기연장을 거절하거나 대출금 일부 상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대출만기가 연장되더라도 중소기업으로선 추가 금리를 떠안아야 한다. 지난 8월 중소기업 평균 대출 금리는 연 7.50%를 기록해 전월 대비 0.20%포인트나 올랐다. 그렇다고 금융기관 대출 외 현금 확보 방안이 많은 것도 아니다. 신용도가 낮은 중소기업의 회사채 발행은 중단된 지 오래다. 코스닥 상장기업들은 유상증자 또는 전환사채 발행으로 자금 확보를 꾀하고 있지만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일부 중소기업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유휴자산 처분에 나서고 있지만 이 또한 여의치 않다. 기업들이 현금 확보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에서 유휴자산을 인수할 주체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파이프 제조업체 E사 총무부장은 “회사 소유 부동산, 비주력 설비 등 유휴자산을 지난해 말 장부가액 이하로 내놨지만 아직까지 팔리지 않고 있다”며 “살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데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최근 상당수 중소기업이 사채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명동 사채시장 관계자는 “최근 중소기업들이 어음할인을 하겠다며 찾아오는 사례가 잦아졌다”며 “이번 달 초엔 국내 굴지의 건설업체가 3개월 만기어음을 월 3부에 할인 받아 깜짝 놀라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명동 사채시장은 IMF 때와 다를 게 없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채시장에 간다고 모두 돈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블랙 리스트’에 오른 중소기업들은 사채시장에서도 외면당하고 있다. 웬만한 중소기업 아니면 초단기 자금 확보조차 힘들다. 실제 유력 건설업체 F사는 ‘유휴자산 매각 대금으로 위기를 간신히 극복했지만 6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 탓에 어음할인을 받지 못했다.
종합건설업체 G사는 ‘모회사가 직접 나서 지급보증을 서겠다’고 했음에도 자금조달에 실패했다. 신용이 워낙 바닥이었기 때문이다. 이재선 대부소비자금융협회 사무총장은 “시중 자금줄이 말라 가산금리를 주고서도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대부업체들도 추가대출보다는 원금회수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소기업들은 이제 비빌 언덕도 마땅치 않다. 금융위기가 점차 기업들의 목을 죄어오는 상황이다.
대우 패망에서 배우는 교훈
신뢰 잃으면 끝장이다
외환위기 직전 대우그룹의 부채비율은 300%였다. 혹자는 대우그룹의 패망을 두고 ‘어차피 높은 부채비율 때문에 망했을 것’이라고 분석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경기가 좋을 때 부채는 순기능적 요소가 많다. 기존 부채의 만기 연장이나 금융기관을 통해 새로운 자금을 차입하거나 매출을 올려 영업이익으로 갚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부채는 경기가 좋을 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경기침체 땐 다르다. 자칫하면 부채가 치명타로 작용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대우그룹이 바로 그런 경우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내실보다는 외형에 치중했다. 일부는 세계경영이라고 포장했지만 다른 한편에선 속 빈 해외 프로젝트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한때 대우그룹은 자동차·의류·조선·건설·전자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다. 자산순위 2위에 오르기도 했다. 젊은이들에게 대우라는 브랜드는 미래로 나아가는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외 금융기관들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다. 김우중 회장의 ‘공격경영’이 국내외 금융기관의 불신을 키웠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대우그룹의 행보에 제동을 건 것은 해외 금융기관들이다. 대우그룹의 해외 프로젝트에 회의를 느낀 이들이 먼저 대우의 자금을 묶었고, 이에 따라 급속히 위험 상황에 직면했다. 이에 따라 ‘돈맥 경화’가 심해졌고, 만기가 돌아온 부채를 갚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까지 몰렸던 것이다. 하루 막아야 할 차입금액이 3조원에 달하는 날이 있었을 정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내 금융기관마저 덩달아 자금 회수에 나서면서 대우그룹은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요즘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들도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대우그룹이 무너지기 직전을 보는 것 같다. 대우그룹의 붕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때다. 김우일 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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