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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냐 사느냐 시련의 계절 왔다무서운 실물경제 위기의 습격

도일 남건욱 2008. 10. 25. 16:35
죽느냐 사느냐 시련의 계절 왔다
무서운 실물경제 위기의 습격
지금 금융위기는 전초전 … 고물가 등 산 넘어 산 연말께면 기업·가계·은행에 유동성 직격탄
항상 그렇듯 금융은 빨리 움직인다. 주식시장이 실물경제에 6개월가량 앞서 간다. 폭락하는 주식시장, 폭등하는 환율은 어제와 오늘 이야기다. 위기가 그것뿐이라고 생각하면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사람이다. 지금까지는 수치(금융)상 위기였다면 이제 진짜(실물) 위기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올 차례다. 여태껏 시장 참여자들의 손익게임이었다면 이제는 모든 국민의 생존 게임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기업도 가계도 은행도 크게는 대한민국까지도 이 게임을 비켜갈 수는 없다. 그러나 예고된 위기는 상처를 최소화하며 수습이 가능하다. 실물경제를 위협하는 현상을 짚어보고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부터 해법도 들어봤다.

사상 유례없는 구제책이 미국에서 속속 나오고 있다. 7000억 달러 구제금융은 시작이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금융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 멀쩡한 ‘사기업’인 은행을 ‘기관’으로 바꿀 태세다.

만약 미국이 그렇게 한다면 금융위기는 일단 진정될 가능성이 있다. 기축통화인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미국이 보증하는 은행은 안정을 찾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제위기는 종착역으로 가는 것일까?

금융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경제는 그렇지 않다. 경제위기는 이제 막 시작되는 상황이다. 금융위기는 항상 실물위기 이전에 온다. 가까이는 97년 외환위기도 그랬고, 멀리는 네덜란드의 ‘튤립 위기’도 그랬다.

금융보다 실물경제가 강한 한국은 그래서 본격적인 충격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은행이 문제다. 한국에 있는 시중은행은 이미 유동성 위기를 강하게 느끼고 있다.

지난 10월 15일 국제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한국의 은행들이 외화자금 조달 압력에 시달리고 있고, 자산건전성과 수익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국민은행 등 6개 시중은행과 우리금융지주·신한카드를 ‘부정적 관찰 대상’으로 지정했다. 이를 외국계 신용평가기관의 불공정으로 몰기엔 은행들의 체력이 너무 부실하다.

시중은행의 자금부장은 “은행채는 물론 양도성예금증서(CD) 발행도 여의치 않다”고 털어놓았다. 한마디로 예금을 제외하곤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덕분에 시중은행의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7%를 훌쩍 넘어섰다. 달러의 부족은 더 심하다. 금리가 문제가 아니다. 매물 자체가 귀하고 조달할 방법이 없다.

생존게임 시작된 한국경제
기업 대외비로 비상 경영체제 돌입
은행 고금리 당근으로 자금확보전
가계 지출 늘고 소득 줄어 적자 비상
은행들은 기업에서 보유한 외화를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이지만 기업 역시 지금 믿을 것은 달러밖에 없다. 은행들은 유동성 확보 경쟁에 들어섰다. 97년에 이미 겪은 일이지만 유동성 부족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은행이 가장 먼저 생존경쟁에 들어선 셈이다. 기업들은 조금 나을까? 일단 밖으로는 태연하다. 하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위기가 위기를 부른다고 진짜 위기 때는 위기라는 말도 함부로 꺼내지 못한다. 극단적인 공포 앞에서는 비명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다. 국내 10대 그룹 중 한 곳은 10월 초 사장단 회의에서 회장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말까지 투자와 관련된 안건은 사장단 회의에 올리지 마라. 달러든 원화든 그룹으로 들어온 돈은 최대한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해라.”

평소보다 짧은 1시간여 만에 끝난 회의는 뒤풀이도 없었다. 회의에 참석한 한 계열사 사장은 “지난 5년간 가장 짧고 간결한 회의”라고 말했다. 또 다른 30대 그룹 회장은 계열사 사장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 벌이고 있는 사업은 흔들림 없이 추진해라. 대신 아직 실행에 들어가지 않은 사업은 당분간 연기해라.”

완곡한 표현이지만 쉽게 말해 ‘더 이상 일을 벌이지 말라’는 얘기다. 이 그룹 계열의 건설사는 사업 승인이 떨어졌더라도 아직 땅 파기가 시작되지 않은 곳은 사업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외국계 기업도 마찬가지다. 한 다국적 의료기 회사는 최근 들어 영업실적이 급감했다.

 

고가인 의료장비의 특성상 대부분의 고객이 리스로 구매하는데 본사와 연결된 리스회사가 유동성 위기로 지난달부터 리스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이제 병원들도 장비를 사려면 현금을 가지고 가야 하는 상황이다.

기업들도 유동성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나마 가계는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덜 느끼는 편이다. 그렇다고 가계에 충격이 덜하다는 뜻은 아니다.

지진파에서도 속도가 가장 느린 L파의 파괴력이 제일 크다. 사실 ‘금융위기’라고 떠들지만 대출 이자는 올 들어 1% 남짓 올랐다. 1억원을 대출한 가정에서도 월 8만원 정도 부담이 더 생긴 셈이다.

이 정도로 심각한 위기라고 하긴 힘들다. 펀드가 반 토막 난들 어차피 미 실현 손실이기 때문에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지금 위기설은 괜한 호들갑일까? 그렇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위기는 항상 앞에 있다. 10월 들어 급등한 환율은 연말께 되면 본격적으로 물가에 반영된다. 생활비의 급격한 증가는 그때쯤 실감할 수 있다.

이미 시작된 금융권과 기업의 위기는 연말부터 직장의 존폐와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눈치 빠른 외국계 기업들은 이미 헤드 카운트(head count: 적정 인력에 대한 점검)를 시작했다. 증권가에서는 연말 성과급은 말도 못 꺼내고 감원설이 빠르게 번지고 있다. 최고의 직장 중 하나인 외국계 은행들도 연말 성과급은 물 건너 간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경기의 침체로 내년 수출실적이 올해보다 좋지 않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 지금 설비와 인력을 그대로 가져갈 기업이 얼마나 있을까? 노조 때문에 정리해고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성과급은 줄어들거나 없어지고, 특근이나 잔업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임금 상승도 난망한 일이다. 대출금리와 물가는 오르고, 실질소득은 감소한다.

같은 월급이지만 적자가 발생한다면 가계 역시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 이르면 연말, 늦으면 내년 봄이면 이런 상황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이제 한국은 고단한 생존경쟁에 돌입했다. 지금까지 위기가 형체 없는 금융의 위기였다면 이제는 실체가 있는 삶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11년 전 겪었던 것을 떠올리면 짐작할 수 있다. 원한 건 아니지만 냉혹한 시절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