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 부채가 재앙의 씨앗이다
9월 위기설 뿌리를 찾아서
10년 만에 3.5배 늘어 … 외환위기 가능성 낮지만 장기침체 올 수도
10년 만에 3.5배 늘어 … 외환위기 가능성 낮지만 장기침체 올 수도
FRB 의장을 지낸 앨런 그린스펀의 회고록 『격동의 시대』의 한 대목이다. 이 글만을 본 대다수는 그의 임기 만료 직후 터진 서브프라임 사태에 대한 언급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재직 시절 중 최악의 시기로 꼽은 때는 따로 있다.
그의 재임 초기인 1980년대 후반이다. 그는 재직하자마자 블랙 먼데이(Black Monday)를 견뎌야 했다. 1987년 10월 19일 하루 만에 시가총액이 무려 23%나 공중으로 사라져버린 금융시장의 대참사였다. 그러나 이 사건보다 그가 더 고통스러워했던 일은 저축대부조합(Savings and Loans·S&L) 사태였다.
이 조합은 역사가 18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소규모 지방 은행들이다. 각 지역에서 예금을 거둬 가계 대출을 해 주는 것을 본업으로 한다. 이들은 1970년대와 80년대 금융 규제완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미국의 상업은행과 직접 경쟁을 벌이게 됐다.
마구잡이 식으로 거액의 대출을 해 줬는가 하면 수지가 맞지 않는 금융상품을 내놓기 일쑤였다. 그 결과 19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4000여 개의 조합 가운데 1000여 개가 줄도산 하기에 이르렀다. 미 정부는 무려 1500억 달러(약 150조원)의 구제금융을 실시해야 했다.
이 사태에 따른 부동산 시장 붕괴로 1990~1992년 갑작스러운 경기 침체를 겪어야 했다. 이와 함께 계속된 신용 경색으로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도 한층 어려워졌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S&L보다 심각
많은 경제학자가 이미 언급했듯, 지난해부터 본격화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저축대부조합 사태를 빼다 박았다. 부동산 시장 붕괴와 신용 경색, 그리고 경기 침체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당시보다 훨씬 나쁘다.
저축대부조합 사태의 영향은 미국 내에 머물렀지만 지금은 다르다. 많은 금융기관이 좋은 투자 상품이라며 서브프라임 모기지 연계 파생상품을 전 세계에 팔았기 때문이다. 파생상품의 레버리지 효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붕괴 위험은 당초보다 크게 증폭됐다
피해액을 정확히 추산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1990년대 이후 급진전된 금융시장의 국제화는 금융 불안 심리를 전 세계에 체계적으로 수출하는 역효과를 몰고 왔다. 현재 우리 금융시장에 떠도는 ‘9월 위기설’을 이해하기 위해 금융 불안의 진원지인 미국의 상황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폭발 우려 큰 통화의 역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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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잖아도 달러는 미국으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짙다. 미국 금융시장이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정적인 투자처로 꼽혀서다.
미국 정부의 채권 같은 금융상품은 가장 안정적인 투자 대상으로 분류된다. 사실 이 점은 미국이 오랫동안 쌍둥이 적자, 즉 재정 적자와 무역수지 적자에 시달리면서도 비교적 쉽게 버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미국은 사상 최대의 쌍둥이 적자를 겪고 있지만 다른 나라처럼 정부가 파산 직전이라거나 나라 전체가 외환위기를 맞을 거라는 전망이 따라붙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어떤 양복점에 가서 옷을 외상으로 맞춰 입으면, 다음 날 바로 그 옷값만큼 다시 빌려준다는 얘기다. 그런 양복점이 있다면 누구라도 매일 옷을 맞춰 입으려 들 것이다. 미국에서 금융 불안이 심각해지면 통화의 역류(money backdraft) 규모와 속도는 평상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미국의 주요 금융기관들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현금을 확보하려는 데다, 역설적이지만 안전한 투자지로서 미국의 매력이 상대적으로 더 커지기 때문이다. 이때 국제 금융시장은 사소한 문제라도 터지기만 하면 폭발할 것 같은 위험한 상황이 된다.
이는 소방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역류’(backdraft) 상황과 흡사하다. 건물의 어떤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처음에 공기는 그곳을 빠져나간다. 하지만 불길이 거세지면서 공기가 부족해진 화재 진원지는 급속도로 공기를 빨아들인다.
이들이 불꽃과 만나면 큰 폭발이 일어난다. 할리우드 영화인 ‘분노의 역류’(1992년 작)에서 잘 묘사했듯, 화재 진압 중인 소방관이 눈에 띄지 않게 이뤄지는 이 역류 현상에 걸려들면 목숨을 빼앗기기 십상이다. 우리 금융시장의 불안감 역시 이와 비슷한 통화 역류 현상에서 비롯됐다.
만일 우리 증시에 들어와 있는 외국 자본이 다 빠져나간다면? 우리가 얻은 빚을 일시에 돌려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의문에서 비롯된 불안 심리가 급속도로 유포되는 중이다. 특히 올봄부터 9월에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이 80억 달러가 넘는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것이 9월 위기설의 단초였다. 여기에 더해 주식시장에서도 몇 달째 외국인 자본의 이탈이 계속돼 왔다. 또 당장 1년 안에 갚아야 하는 단기 외채가 올해 들어 12%나 늘어났다. 전체 외채에서 단기 외채가 차지하는 비중도 40%가 넘어 외환위기 당시와 비슷해졌다.
통화 역류에 따른 달러화 기근 현상으로 우리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도 급상승하고 있다. 1달러에 2000원 가까이 상승했던 외환위기 때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최근 한 달간의 환율 상승 속도는 당시와 거의 맞먹는다. 10년 만의 경상수지 적자도 불길하다.
급기야 외환위기의 악몽이 되살아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일단 외환위기를 겪고 나면 10년 후 다시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는 속설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의 관리능력도 시장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제2의 외환위기 가능성은 낮아
그렇다면 외환위기와 같은 유동성 위기가 재연되는 걸까? 여러 가지 요소를 종합해 보면 가능성은 높지 않다. 우선 9월 만기 도래 채권액 자체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현재 정부가 파악한 액수는 67억 달러 정도다. 7월 한 달 동안 많이 줄어들었다.
더욱이 외국인이 보유한 채권은 전체 채권 시장의 5%를 약간 넘는 정도에 불과하다. 더욱이 외환보유액도 2400억 달러에 달한다. 전체 단기 부채보다 큰 규모다. 단기 부채도 그 성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외환위기 당시와는 좀 다르다. 절반 가까이가 외국은행 국내 지점들이 본사의 자금을 들여온 것이다.
물론 금융 불안 심리가 잦아들지 않고 더 커진다면 상황은 어려워질 수도 있다. 특히 정부가 환율을 방어한다고 외환보유액을 외환 시장에 쏟아 붓는다고 쳐보자. 시장의 불안 심리는 더욱 고조되고 투기 세력까지 가세할 것이다. 외환위기의 재판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러나 정부가 이런 최악의 대처만 하지 않는다면 위험한 상황은 아니다. 다만 유동성 위기에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신용 경색 현상은 불가피할 것이다. 국내 금융기관이나 기업들이 필요한 자금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이때는 한계 기업뿐만 아니라 가계나 개인도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2000년 대우그룹이 무너졌을 때나 2004년 신용카드사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와 같은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10년 만에 세 배 반 늘어난 가계 부채
나라 밖에서 일어난 불이 우리에게 옮겨 붙지나 않을까 걱정하느라 우리는 정작 나라 안 불길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가계 부채가 바로 국내의 화재 지원지다. 외환위기 직전 186조원에 불과했던 가계 부채는 최근 680조원에 달한다.
10여 년 만에 무려 세 배 반으로 증가한 것이다. 두 가지 요소 때문이다. 2001년과 2002년 두 해 동안 가계는 벌이 이상으로 씀씀이를 늘렸다. 가계는 금융기관이나 기업과 달리 해외에서 달러를 빌려 쓰는 주체가 아니다. 최근 3~4년간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너도나도 주택담보대출을 늘린 것도 가계 부채 급증의 원인이다.
그 결과 현재의 수입으로 평균 3900만원에 달하는 빚을 감당 못하는 가구가 무려 10가구 중 3가구에 달한다. 미국에서 비롯된 신용 경색과 금융 불안이 국내에 상륙하면서 가계 부채 문제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금리가 뛰면서 원리금 부담이 증가하고 있다. 전반적 자산 가격 하락세로, 빚 얻어 산 부동산이나 주식도 맥을 못 추고 있다. 개인 파산이 급증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1월 1만여 건에 불과하던 개인 파산은 7월 말까지 7만여 건으로 늘어났다.
일본과는 다른 한국형 불황
가계 부채가 는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헤아릴 필요가 있다. 빚 문제로 집안이 쪼들리게 되면 씀씀이를 크게 줄일 수밖에 없다. 최근 소비가 급격히 위축되는 것 역시 한계에 처한 가계가 크게 늘고 있어서다. 가계야말로 내수 경기의 주역이라는 점에서 장기 내수 불황을 예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흔히 정부와 언론은 외환위기와 함께 일본식 장기 불황을 우려한다. 부동산 값 폭락에 따른 금융기관 부실화로 경제가 장기간 침체를 겪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당장 우리 부동산 가격 하락이나 금융기관 부실화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형 장기 불황의 가능성도 높지 않다.
대신 형편이 어려워진 가계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내수 장기 침체의 가능성이 더 높다. 경기가 살아날 듯하면서 영 살아나지 않는 상황이다. 이는 일본과는 다른 한국형 불황이라고 할 만하다. 제2의 외환위기나 일본형 장기 불황의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점은 좋은 소식이다.
반면 가계 부채가 급증하면서 내수 경기가 장기간 살아나기 힘들다는 것은 나쁜 소식이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당장은 아프지만 단기간에 치유할 수 있는 질병과 당장은 덜 아프지만 장기간 치료가 힘든 병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은지를 따지는 것과 흡사하다.
이 모든 질병의 공통점은 단 한 가지다. 모두 능력 이상의 빚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앨런 그린스펀이 일찍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경고한 그대로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즉흥적인 만족감을 높이기 위해 벌 수 있는 미래 소득에 반해 돈을 빌리려는 사회는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에 시달리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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