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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아줌마 10개월 새 2억 벌어달러

도일 남건욱 2008. 10. 20. 09:41
강남 아줌마 10개월 새 2억 벌어
달러 투기에 나서는 보통사람들 작년 11월부터 50만 달러 사들여 … 300만 달러 한국에 보낸 재미동포도
한정연 기자·jayhan@joongang.co.kr
일선 지점 직원은"VIP 고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은행 대여금고 속에는 달러가 뭉치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달러 광풍이 한반도를 휩쓸고 있다. 환율이 1400원대를 넘나들면서 보통사람들까지 환투기에 나서고 있다. 강남 아줌마 A씨는 10개월 만에 2억원을 벌었다. 지금의 달러 사재기는 마치 전쟁 난다는 말에 라면을 사는 형국과 흡사하다. 이런 가수요가 폭증하면서 환율은 정부 통제권 밖으로 벗어나 버린 듯하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개인 욕심을 버리라”고 경고했지만 브레이크는 말을 듣지 않고 있다. 보통사람의 달러 투기를 통해 지금 우리 달러 시장의 난맥상을 들여다봤다. 10월 9일 오전 11시40분 남대문시장 입구. ‘그들만의 외환시장’이 폐장을 앞두고 분주했다. 암달러상들이 좌판을 벌이는 ‘남대문 외환시장’은 낮 12시면 파장이다.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J 아줌마는 100달러를 13만6000원에 사서 13만9800원에 팔았다. 같은 시각 시중은행은 100달러를 13만5900원에 사고 있었다. 함께 일하는 한 중년 남성이 휴대전화를 든 채 ‘14만원’이라고 일러주자 J 아줌마는 그 즉시 판매가를 200원 올렸다. J 아줌마는 쏟아지는 문의 전화에 정작 장사를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다.

“무슨 전화냐고? 지금 (달러를) 얼마에 사겠느냐고 물어보는 거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휴대전화에 불이 났다. 전화의 대부분은 달러가 얼마나 올랐나 확인하는 개인 판매자들의 문의다. 암달러 시장은 1만 달러 이하의 소액 장사가 대부분이다. 한 중년 여성은 아예 J 아줌마 옆에 의자를 갖다놓고 조금이라도 달러 값이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5분 전에 왔던 손님이 다시 와서 달러 값을 물어보고는 슬쩍 사라지기도 했다.

다른 환전상도 마찬가지였다. 삼삼오오 모여 팔짱을 끼고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느냐는 얘기를 주고받는다. 암달러 환전상도 신용경색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J 아줌마는 “진짜 큰손은 다 은행 가서 하지 뭐 하러 여기 오겠느냐”면서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냐”며 혀를 찼다. 달러 장사가 잘돼 좋지만 그도 지금의 달러 시장이 정상은 아니라고 보는 듯했다.

대구 K씨 시세차익 석 달 새 2억5000만원

지난해 11월 한 은행의 강남역 외환 전용 상담소. 강남에 사는 주부 A씨는 원-달러 환율이 940원을 찍자 4억7000여만원을 주고 50만 달러를 샀다. A씨는 10월 9일 현재 이미 2억950만원의 시세차익을 보고 있다. 하지만 A씨는 아직 달러를 갖고 있다. 더 오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대구에서 납품업체를 운영하는 K씨(40)는 자수성가한 기업인으로 유명하다. 특히 부동산과 주식, 외환 시장을 넘나드는 재테크로 2000년 이후 재산을 크게 불렸다. 대구 모 지역에서 K씨는 ‘재테크의 달인’으로 통할 정도. 그는 그간 환율이 오르면 달러나 엔화를 대량으로 사둬 큰 차익을 실현해 왔다.

아파트가 뜬다는 기사가 나올 때면 이미 K씨는 아파트를 팔아 돈을 벌었다는 게 지인들의 전언이다. K씨는 올 7월 말께 환율이 석 달째 1000원대를 유지하자 6억원 조금 넘게 들여 60만 달러를 사뒀다. 그의 최근 시세차익은 2억5000만원을 넘나들고 있다. 적립식으로 달러 사재기를 한 경우도 있다.

금융권에 종사하는 B씨도 지난해 10월부터 거의 매달 시장 상황을 봐가며 한 번에 5000만원 정도씩 달러를 사뒀다. B씨가 현재 보유한 액수는 45만 달러. B씨도 상당한 시세차익을 올렸지만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던질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은행 관계자들은 달러 사재기를 하는 사람은 대부분 ▶해외 나들이가 잦고 ▶개인사업을 하며 ▶환투기 경험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전한다.

외환 거래가 많은 한 은행의 월별 외화예금 잔액을 보면 강남 아줌마 A씨가 달러를 사들인 2007년 11월 잔액은 58억5700만 달러였다. 하지만 2007년 12월에는 한 달 새 외화예금 잔액이 13억6700만 달러나 급증한 72억2400만 달러였다. 8월 현재 전체 외화예금 222억3000만 달러에서 개인 보유 외환은 20억2000만 달러나 된다.

모 은행 강남지점 담당 직원은 “살 사람은 지난해 말 이미 다 사뒀다”며 “과거에도 달러 사재기를 해봤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이번에도 재미를 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남대문 암달러상인 J 아줌마가 ‘진짜 큰손’이라고 부르는 달러 사재기 멤버들은 고객번호를 입력해야 문이 열리는 시중은행 VIP 지점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은 전담 PB(Private Banker)를 두고 대여금고에 달러를 쌓아놓은 지 오래다.

분당의 한 VIP 전용 은행지점 직원은 “(큰손 고객들이) 달러를 외화예금과 대여금고에 분산 보관한다”고 말했다. 대여금고는 보증금 15만~30만원만 내면 소액의 수수료만 떼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VIP 고객은 그나마 수수료도 면제다. 분당의 또 다른 은행 팀장은 “한 무역업체 사장이 9월 초 달러가 1100원대로 오르자 30만 달러를 사서 외화예금에 넣어뒀다”며 “8~9월 투자 목적으로 달러를 사려는 문의 전화가 많았고 10명 중 2~3명 정도 실제 투자를 했다”고 말했다.

외환시장이 불안한 최근에는 문의가 사실상 끊긴 상태다. 투자 금액은 대부분 4만~5만 달러대지만 환차익을 노린다는 점에서 실수요자와는 구별된다.

 

PB 지점 대여금고 안의 달러 규모 꽤 클 듯


이처럼 대량으로 달러 사재기가 가능한 것은 2000년 제2차 외환 자유화로 내국인의 외환 보유 한도가 폐지됐기 때문이다. 한 은행 직원은 달러 사재기 현상은 사실상 제도적으로 막을 길이 없다고 지적했다. 경고성 발언이나 규제 행위는 오히려 달러 사재기 세력에게 출발신호와 같다는 것.

10월 들어 사재기는 주춤하다. 지금은 개인이 이미 확보해둔 달러를 던질 타이밍을 고르고 있다는 것이다. 달러가 오르기만 기다리는 사재기 세력이 보유한 액수만큼 외환 공급도 줄어드는 것이다. 사재기는 가수요를 부르고 가수요는 다시 사재기를 부채질한다. 달러가 정작 필요한 기업은 발만 구르게 된다.

경제 전문가들은 개인의 달러 사재기에 비교적 무심했다. 기업이 달러를 쌓아두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게 중론이다. 한 경제연구소 본부장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정상적인 경제활동”이라고 말했다. 다른 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비중이 적어 별 큰 문제는 없다”고 밝혔다.

기획재정부 외환제도과의 한 사무관은 “시장 모니터링을 통해 일부 환투기가 있다는 얘기는 듣고 있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별도로 고려하고 있지 않다”며 “외환 관련 정책은 이미 마련해 놓은 단계별 대책에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마련한 외환정책은 ▶모니터링 강화와 외화 유동성 공급 ▶외화자금 수요 조절과 공급 확대 ▶직접 규제의 3단계로 진행된다.

미 영주권자·이민자 아파트 판 돈 되팔아 차익도

달러 사재기가 외환시장 개미들의 한 축이라면 또 다른 축은 재미동포나 이민·취업 등을 이유로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이다. 정부가 외환시장 전면 자유화는 일단 유보했지만 이미 해제된 규제만으로도 일부 개인투자자들은 상당한 환차익을 올리고 있다.

해외에 거주 목적으로 나가게 될 경우 아파트 등 국내 자산을 처분한 증명만 하면 이 대금을 그대로 들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다 지난해 미국으로 이민 간 C씨는 강남역에 있는 한 은행 지점을 통해 120여만 달러를 다시 들여왔다.

지난해 9억원에 아파트를 팔고 미국에서 식당을 운영할 계획이었지만 환율이 급등하자 힘들게 일해 버는 돈보다 가져갔던 돈을 고스란히 가져오는 게 더 남는 장사기 됐기 때문이다.

이 지점 금융팀장은 “해외 동포들이 자산을 한국으로 들여오는 경우가 많다”며 “며칠 전에도 한 재미동포가 300만 달러를 들여왔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10월 9일 발표한 ‘최근 외환시장 동향 및 대응 방안’ 보고서는 국내 보유 외환의 활용도 제고의 방법으로 당근정책을 제안했다.

외화 예금주에게 대출을 조건으로 가산금리와 감세 등을 적용해 잠자는 달러를 시장으로 끌어들이라는 주문이다. 환율 상승에 대한 기대심리를 차단하라는 것. 강남역의 한 은행 지점 직원은 “정부가 개인의 작은 환투기에는 속수무책이면서 대형 투기자본은 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