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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보단 잿밥” 정쟁에 민생 좌초"

도일 남건욱 2009. 2. 11. 17:35
“염불보단 잿밥” 정쟁에 민생 좌초
“국회 계류법안만 2500건 훌쩍 … 민생법안 처리 미루고 정치국회에만 골몰”
중산층 죽이는 2월 여의도 혈전
대한민국의 추락, 날개가 없다

지난해 말 여야 관계자들이 각종 개정법안을 둘러싸고 몸싸움을 하고 있다.

불황 쓰나미가 덮친 대한민국은 지금 시계 제로 상태다. 지난해 4분기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전분기 대비 마이너스 5.6%를 기록했다. 외환위기 직후 마이너스 7.8%를 기록한 이후 최대 감소율이다. 국가경제에만 경고등이 켜진 것은 아니다. 민생은 늘어난 가계부채에 허덕인 지 오래다.

성장엔진이 꺼진 기업은 시름시름 앓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민의의 전당’ 국회가 해야 할 일이 많다. 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해 국민 대신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각종 민생법안의 입안·심의라는 본연의 임무에도 더욱 충실해야 한다. 민생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1929년 경제대공황 이후 최악의 불황을 겪고 있는 미국의 의회는 70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법안을 단 2주 만에 통과시켰다. 일본 국회도 12조 엔 규모의 부양대책법안을 보름 만에 처리했다. 전대미문의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우리 국회의 모습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겉으론 ‘경제 살리기’ ‘민생회복’을 부르짖지만 뒷전에선 ‘정치 계산기’를 이리저리 두들기기 바쁘다.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라면 볼썽사나운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본격화하던 지난해 말, 국회의사당에선 아예 활극이 벌어졌다. 거악(巨惡)을 물리치려는 듯 전기톱까지 등장하는 촌극도 연출됐다.

서민을 구제해야 할 국회의원이 정치색을 입힌 병기를 휘둘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월 임시국회의 모습도 크게 다를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이어진 법안전쟁은 이번에도 재연될 게 불 보듯 뻔하다.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법안의 처리시기만 미뤘을 뿐 합의점은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디어 법안 처리를 두고 여야가 기세싸움을 펼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게다가 이번 임시국회엔 용산참사, 장관 인사청문회 등 각종 현안까지 맞물려 있어, 여야의 싸움은 더욱 불꽃 튈 공산이 크다. 민주당이 이번 임시국회를 아예 ‘용산 임시국회’로 규정한 것은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과연 민생법안이 이번 임시국회에서 얼마나 처리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며 “지난해 말처럼 공전에 공전을 거듭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 국회에는 할 일이 태산처럼 밀려 있다. 낮잠 자는 계류 법안만 해도 2월 5일 현재 2536개에 달한다.

이 중 민생법안은 수백 개에 이른다. 국회가 매일 밤샘을 해도 찌든 서민경제를 보듬어주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치권엔 ‘글로벌 경제위기 타개책을 하루빨리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없다.

오히려 각종 민생법안의 처리시기를 놓고 신경전을 펼치고 있다. 한나라당은 야권 측에 법안처리를 위해 상임위원회를 소집해야 한다고 요청하고 있지만 민주당은 대정부질문이 끝나는 18일 이후 상임위를 개최하자며 맞서고 있다. 거대 여당 한나라당은 정국을 이끌어갈 만한 리더십을 잃었고, 민주당은 민생법안 처리에 의지가 없어 보인다.

 

“2월 임시국회에도 민생은 없다”

문제는 각종 민생법안이 이번에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면 서민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 잃는다는 점이다. 세계 불황을 서민 스스로 견뎌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국회 무용론’이 곳곳에서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다. 김성수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지금은 여야를 막론하고 국가경제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며 “대승적 차원에서 경제활성화와 민생안정을 위한 법안이 하루빨리 처리돼야 한다”고 말했다.

국무총리실에 따르면 지난해 정부가 경제 살리기를 위해 추진했던 규제개혁 과제 관련 법률 159개 중 60%가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고 있다. 경제 살리기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규제개혁 작업이 국회에 막혀 진통을 겪고 있는 셈이다. 몇 달째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상임위원회에 계류돼 있는 민생법안도 수없이 많다.

‘저소득층을 위한 전월세 자금의 소득공제 근거 도입(백재현·박지원 민주당 의원)’을 위한 소득세법 일부 개정법률안은 지난해 11월 상임위원회(기획재정위)에 회부됐지만 아직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사교육비를 통제하기 위한 고등교육법 개정법률안도 낮잠에 들어간 지 오래다.

‘휘발유, 경유에 부과되는 교통·에너지·환경세 세율의 30% 인하(유선호 민주당 의원)’ ‘천연가스(LNG) 개별소비세 한시적 면제(박병석 민주당 의원)’ 등 각종 유류세 관련 인하안도 국회 서랍 속에 수 개월째 처박혀 있다. 저소득층 지원 및 사회안전망 확충을 위한 각종 개정안 처리도 답보상태다.

‘아동·장애인·노인 복지사업에 국가보조금 지급의 근거규정을 만들자’는 취지의 보조금의 예산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유재중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해 12월 31일 상임위원회(기획재정위)에 회부된 후 소식이 끊겼다. “사회서비스를 더 많이 창출하기 위해 사회적 기업을 효율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진영 한나라당 의원의 주장(사회기업 육성법 개정법률안)도 6개월 가까이 공염불에 그치고 있다.

여기까진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불황으로 청년실업자가 급증하고, 고용불안이 가속화하고 있음에도 정치권은 관련 법안 처리를 늦추고 있다. ‘청년실업의 효율적 대책’을 담고 있는 청년실업해소특별법 일부 개정법률안(한나라당 홍일표, 민주당 김재윤, 민주노동당 홍희덕 의원 등)은 100여 일 넘게 상임위(환경노동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민생 외면한 정략싸움만 판쳐

“공공기관으로 하여금 기관 정원의 100분의 3 이상씩 청년 미취업자를 채용하도록 의무화하고, 청년실업대책위원회를 설치하자”는 최철국 민주당 의원의 목소리도 공허한 메아리만 남기고 있다. 지난해 11월 12일 환노위에 회부된 김상희 민주당 의원의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지위 및 보호에 관한 법률’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의 일부 개정안도 상임위원회에 회부되자마자 브레이크가 걸렸다.

김상희 의원은 “경영계의 인건비 절감을 위한 경영합리화 전략과 노동시장의 유연화 정책에 따라 특수형태 및 기간제 근로자의 지위가 약화됐다”며 “이들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해 하루빨리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향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막대한 혈세가 투입되는 재정정책 통제방안 마련에도 소홀하다는 점이다.

김동성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해 12월 “외국환으로 지출되는 국가 재정수행사업의 안정성을 꾀하기 위해 종합적 시책이 필요하다”며 국가재정법 일부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아직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민간 재정투자 때 신중한 타당성 분석(김낙성 자유선진당 의원)’ ‘재정정책 예비 타당성 조사의 효율적 실시(김영록 민주당 의원)’를 목적으로 제출된 개정법률안도 이번 임시국회에서 처리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정부는 현재 확장적 재정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책엔 무서운 독(毒)이 숨어 있다. 꼼꼼히 심사하지 않고 돈을 썼다간 국가부채만 늘어날 수도 있다. 일본도 ‘잃어버린 10년’을 회복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돈을 뿌렸다가 ‘부채 망국론’에 시달린 바 있다.

 

경제 전문가들이 ‘확장적 재정지출 정책을 꾀할 땐 면밀한 검토가 필수’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김한기 경실련 경제정책팀 국장은 “정부의 재정정책을 통제하고 심의하는 것은 국회의 몫이자 책무”라며 “경기불황으로 재정정책이 필요한 지금, 국회는 정쟁에 빠져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회의원들은 때만 되면 거리에 나간다. 선거철은 예외 없고, 정치적 홍보를 해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명절이면 값비싼 양복을 벗어 던지고 재래시장에 나가는 금배지들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봤다. 재래시장을 다녀온 국회의원의 말은 똑같다. 색다른 경험을 했는지 아니면 동정심이 유발됐는지 “서민경제를 위해 재래시장을 반드시 육성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하지만 늘 그뿐이다. 2월 5일 현재 계류돼 있는 재래시장 육성 관련 법안은 5~6개에 달한다. 지난해 말 상임위에 회부된 후 별다른 논의가 진행된 적이 없다. 그야말로 직무유기다. 심지어 사회 현안까지 뒷전으로 밀려 있기 일쑤다. 현안이 터지면 관련 법안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봇물을 이루지만 실제로 국회를 통과한 경우는 거의 없다.

2006년 학교급식 파동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다. 30개 학교에서 2314명의 환자가 발생했으니, 난리가 날만했다. 수많은 국회의원이 ‘학교급식법’ 개정법률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18대 국회가 들어선 지금도 학교급식법 개정법률안은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극심한 경기불황으로 민생이 추락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국가적 위기’라며 민생법안의 충실하고 조속한 처리를 약속했던 정치권은 염불보단 잿밥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바로 이것이 민생을 외면한 채 정략싸움에만 몰두하는 정치권의 ‘불편한 진실’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