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전문가는 수치에 승부 걸지 않아 … 적절한 대안 내놓아야 전문가
지난 1월 10일 구속된 미네르바 박대성씨(가운데 모자이크 처리한 사람). |
불확실성이 커지고 불안이 고조될수록 역술인 집이 북적댄다. 선거철이나 경기가 어려울 때가 역술가들에게는 좋은 시절이다. 유명 역술인들은 자신이 맞힌 사례를 내세우며 ‘족집게 같은’ 신통력을 자랑한다. 역술인 모 씨는 김일성 사망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을 예견해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그가 지난 대선 때 차기 대통령 예측에서 틀렸다는 점은 별로 거론되지 않는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다시 돌아오면 사람들의 마음에는 앞날의 운세를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혹시나 하며 운에 기대는 심리도 고개를 든다. 그래서 경기가 나빠질수록 로또 판매가 늘어난다.
이런 상황이 되면 사람들에게는 과거 역술인이 틀린 사례보다는 맞힌 사례가 더 크게 다가온다. 역술인의 틀린 예언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말하자면 역술인은 사람들의 ‘차별적인 기억’에 의존해 틀린 예언을 남발하면서도 계속 영업한다. 사이버 ‘경제 논객’ 미네르바 박대성(31)씨가 대중에게서 ‘경제 대통령’이라는 찬사를 받은 과정도 비슷하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며 이렇게 분석했다. “미래와 관련한 예측과 그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면, 불안 심리가 극도로 팽배한 상황에서는 어떤 사람이 내놓은 수많은 예언 가운데 하나만 맞아도 그 사람과 그 한 가지 예언이 엄청나게 부각된다.”그는 이어 “미네르바가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된 배경으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우선 그는 오프라인 언론과 온라인 언론의 괴리를 들었다. 오프라인 언론이 내놓는 외환시장과 주식시장의 전망과, 온라인 언론에서 네티즌들이 참여해 형성한 여론의 괴리가 커졌고, 이런 가운데 금융시장이 악화되면서 미네르바가 깃발을 든 비관적인 전망이 기세를 떨치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러자 미네르바에게 열광적인 네티즌 추종자들이 따라붙었다.
미네르바의 물가폭등 예측에 모두 함구
다른 배경은 증권사를 비롯한 금융회사들이 내놓은 전망과 미네르바 전망 사이의 큰 간극이었다. 앞의 증권사 관계자는 “사람들은 대개 긍정적인 전망을 듣고 싶어하고, 증권사들도 대개 낙관론을 편다”고 말했다. 반면 미네르바는 극단적인 비관론을 견지했다. 이 증권사 관계자는 “낙관론이 다수인 가운데 소수가 강한 비관론을 내놓다가 주가가 폭락하면 낙관론이 맞을 때보다 훨씬 큰 반향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역술가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미네르바의 예측도 틀린 게 더 많았다. 그는 원화 가치가 달러당 1100원대이던 지난해 10월 초에 환율이 1400원 넘도록 원화가 급락할 것이라고 내다봤고, 이 예측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하지만 환율을 제외하고는 신통치 않았다.
그가 과녁에서 가장 벗어난 항목은 물가.
그는 지난해 8월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을 외쳤다. 그는 “원자재 펀드에 투자하면 적어도 25% 이상 수익률이 보장된다”고 적었다. 그러나 국제 원자재 가격은 상승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라 국내 원자재 펀드는 수익은커녕 손실을 키웠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하반기에 물가가 폭등한다고 점쳤다.
그는 경기가 하강하는 가운데 물가가 치솟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올 것이라며 생필품을 비축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물가상승세는 8월 이후 점차 진정되고 있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은 8월에 5.6%를 기록한 뒤 차츰 낮아져 12월엔 4.1%를 기록했다. 미네르바는 또 금리가 오른다는 관측을 7월부터 줄기차게 내놓았다.
물가가 오르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리고 이에 따라 시중 금리도 상승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하지만 앞서 통계로 제시한 것처럼 경기 침체기에는 물가가 안정될 수밖에 없다. 물가 불안 우려보다 경기 침체의 충격이 더 큰 상황에서 한은이 기준금리를 높일 이유가 만무하다.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은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나란히 금리를 낮췄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8월 연 5.25%였던 기준금리를 다섯 차례에 걸쳐 줄기차게 떨어뜨려 연 2.50%로 낮췄다. 특히 지난해 10월 27일에는 긴급 금융통화위원회를 소집해 무려 0.75%라는 사상 최대 폭의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지난해 11월 중순 한 월간지에서는 종합주가지수(KOSPI)가 “연내에 500까지 간다”고 예측했다. 그는 “한국은 500, 미국은 5000선이 올해의 바닥”이라며 “더 심각해질 경우 (한국 주식시장은) 500선도 붕괴될 수 있다”고 기고했다. 그러나 코스피는 그 이후 1000선 위에서 등락했을 뿐, 강한 하락 추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몇 가지 관측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미네르바가 틀린 예측을 다수 내놓았을 뿐 아니라 분석 틀이 적합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수요가 급격히 위축돼 세계 경기가 후퇴하는 상황에서 물가 상승과 금리 인상을 예측했다. 그는 또 한물간 종속론적 시각을 어설프게 드러냈다.
그는 한국 경제가 일본 자본에 종속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상당한 일본 자금이 국내에 유입된 상황에서 앞으로 금융위기 과정에서 일본이 국제통화기금(IMF)을 통해 한국을 점차 옭아맨다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 금융회사의 채권을 더 매입함으로써 한국 경제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논리는, 미국 국무부 채권을 가장 많이 보유한 중국이 미국을 쥐고 흔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로 엉뚱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미네르바 열풍이 불면서 그를 대단한 인물로 띄우는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그가 거친 표현으로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한국 경제의 미래를 암울하게 그렸지만 실은 대단한 학력과 경력의 소유자라는 말이 많았다.
“경제 예측은 틀리게 돼 있다”
한 정부 당국자가 “미네르바가 50대, 증권사에 다녔고 해외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남자”라고 했다는 말이 퍼졌다. ‘미네르바의 친구’라는 한 네티즌은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미네르바는 사회활동도 많이 해 존경 받는 기업인”이라고 했다. 그는 “미네르바가 1% 상위층 중의 상위에 속하는 0.1%의 극상위층”이라고도 주장했다.
검찰이 박대성씨를 붙잡아 기소하면서 미네르바가 공고와 전문대를 졸업한 백수임이 드러났다. 기존 인식과 어긋나는 새로운 사실을 접했을 때 사람들은 기존 인식을 깨기보다는 새로운 사실에 무언가 착오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받아들인다. 네티즌들은 “검찰이 잡아들인 박대성씨가 아닌 다른 미네르바가 있을 것”이라며 다수의 미네르바 설을 내놓았다.
그러나 설령 다른 미네르바가 있고, 예컨대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이 그 ‘진짜 미네르바’가 쓴 것일지라도 결국 논리와 주장은 대동소이하다. 따라서 다수의 미네르바 설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미네르바 열풍에 기름을 부은 건 일부 언론과 국회의원, 학계 인사들이었다.
신문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미네르바 추적기를 써대는 와중, MBC 뉴스데스크 앵커는 “미네르바의 한 수에 귀를 기울이는 게 맞아 보인다”고 했다. 한나라당 홍일표 의원은 대정부 질문에서 “이 사람(미네르바)이 대단한 경제적 식견을 가지고 ‘리먼브러더스 부실 사태’도 예언했고, 여러 가지 예리한 비판도 하고 있는데…”라고 말했다.
민주당 최문순 의원은 한 행사에서 “제도권 언론과 정치인을 모두 합쳐도 미네르바만 못하다”고 말했다. 미네르바 띄우기 중 압권은 경제수석과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을 지낸 김태동 성균관대 교수의 말이었다. 김 교수는 미네르바 관련 TV 프로그램에서 인터뷰한 뒤 해당 프로그램의 인터넷 게시판에 이렇게 올렸다.
“미네르바가 맞힌 경제 예측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당신은 제가 아는 한 가장 뛰어난 국민의 경제 스승”이라고 극찬했다. 네티즌과 김 교수의 미네르바 우상화는 그러나 경제학자의 역할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경제에 대한 예측은 틀리게 돼 있다”고 말했다.
홍기석 이화여대 교수는 “경제를 전망할 때 수많은 변수를 다 정확하게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히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홍 교수는 “점쟁이라면 결과만 얘기하고 결과로 평가 받는 반면 경제학자는 주요 요인이 어떻게 작용해서 경제가 어떤 경로를 갈지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한 경제연구소의 간부는 익명을 전제로 이렇게 말했다. “환율과 주가는 수많은 국내외 경제·비경제 요인이 반영된 최종 수치이기 때문에 이들 수치를 맞힌다는 건 그야말로 게임의 영역이다. 숫자를 맞히는 게 전문가라면 로또 숫자를 맞힌 1등 당첨자야말로 최고의 전문가란 말인가.”
신장섭 교수는 비슷한 맥락에서 ‘잘못된 구체성의 위험’을 지적했다. 불확실성이 매우 큰 상황에서 어떤 지표가 어떻게 변할지 정확히 맞혔다고 해서 그 예측이 정확하다고 하는 건 잘못이라는 얘기다. 신 교수는 “잘못된 구체성의 위험은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가 경고한 개념”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떤 수치가 예를 들어 4%와 8%의 중간에 있다는 것밖에는 확인할 길이 없는 상황에서 6%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고 합시다. 실제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고 해서 그 예측이 정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신 교수는 경제 전망이 빗나가는 원인으로 분석 모델의 정교함이나 변수의 예상치 못한 움직임 외에 다른 측면을 들었다.
그는 경제는 순수한 관찰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경제는 멀리 떨어져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정부, 기업, 금융, 가계 등 우리 경제주체들이 들어가서 만들어가는 영역입니다. 경제에 대한 전망이 경제주체의 심리에 영향을 줘서 경제에 다시 피드백 될 수 있어요. 또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황혼 내린 뒤 나래 펴는 미네르바 불필요
“경제는 우리가 하기 나름”이라며 신 교수는 한국의 외환위기 극복 경험을 예로 들었다. 외환위기에 빠져 발버둥치던 1998년에 경제 전망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99년 경제성장률을 1.5~2%로 내다봤다. 다른 연구소의 예측도 비슷했다. KDI는 기업과 금융 구조조정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경제가 2% 안팎 성장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1.5% 위축된다고 설명했다.
결과는 그러나 예상을 기분 좋게 벗어났다. 한국 경제는 99년에 10.9% 성장했다. 공적자금을 투입한 과감한 금융구조조정과 금융회사를 통한 기업구조조정, 그리고 재정지출 확대와 소비진작 등이 어우러진 성과였다. 그렇다면 경제전문가가 할 일이란 무엇인가. 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 대표는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져도 해결 가능성이 없진 않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고통을 최소화하거나 침체를 최단기에 끝내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게 경제전문가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상황이 악화된 뒤에 앞으로 더 안 좋아질 거라는 비관론을 펴기보다는 악화되기 전에 경고하고 각 경제주체가 대응책을 마련하도록 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요즘 상황에서 아파트 가격이 대폭락하리라고 전망하는 것보다는 일찌감치 부동산 버블에 대비해 대출한도를 설정하도록 하는 것이 경제전문가의 제대로 된 역할이라는 설명이다. 홍기석 이화여대 교수는 “경제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질 때 잠재적 위험을 정확히 진단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신용카드가 내수를 일으켜 일부 경제분석가가 “이제 한국이 내수 중심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은 적이 있다. 2001년 무렵이었다. 그때 제대로 된 경제전문가라면 “신용카드 남발이 당분간은 내수를 활성화하겠지만 개인신용불량 문제를 일으키며 내수 침체를 야기할 것”이라며 소비자신용 규제를 주장했어야 했다.
황혼이 내린 뒤 비로소 나래를 펴는 미네르바는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들 한참 왕성하게 활동할 때 목소리를 높이는 경제전문가가 필요하다.
경제 전망이 틀릴 수밖에 없는 4가지 이유
1. 수많은 변수가 어떻게 움직일지 모두 정확히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2. 예기치 못한 돌발 변수가 나오게 마련이다 3. 경제주체의 심리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다 4. 경제는 경제주체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경제전문가가 할 일 3가지 1. 현재 경제 상황을 정확히 진단 2.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일 때 위험 요인을 지적하고 대응 방안 처방 3. 경제가 어려울 땐 위기를 극복하거나 고통을 덜 대안 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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