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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학점의 여의도 경제학부실 법안·정쟁에 ‘의회 경제 실종’

도일 남건욱 2009. 6. 5. 20:15
F학점의 여의도 경제학
부실 법안·정쟁에 ‘의회 경제 실종’
법안 발의 4000건에 가결률은 10% 안 되는 ‘거품 발의’
쟁점 터질 때마다 대화보단 점거와 농성 되풀이
5월 30일은 18대 국회 개원 1주년이다. 일하는 국회였나? 경제위기 해소를 위해 의회 경제의 힘을 보여줬나? 전혀 그렇지 않다. 82일을 놀고 시작한 국회는 법안 거품 발의, 정당 간 정쟁, 점거와 농성, 계파 싸움으로 얼룩졌다. F학점이다.

입법 지원기관인 국회 입법조사처 직원들은 지난 1년간 야근을 밥 먹듯 했다. 한 입법조사관은 “거의 매일 야근이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법안 조사·분석을 요청한 국회의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법안심사 요청건수만 3800여 건에 달했다. 국회는 입법과 관련된 업무 과부하를 해소하고 국회의원들의 입법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조만간 의원회관 내에 의정종합지원센터를 설치할 예정이다.

입법 활동으로만 본다면, 18대 국회의원들은 ‘수퍼맨’이다. 지난 1년 동안 발의한 법안은 5월 21일 현재 4039건이다. 16대 국회보다 세 배 넘게 많았던 17대 국회 전체 발의 법안 6387건의 절반 이상을 1년도 안 돼 쏟아냈다.

연간 국회의원 1인당 평균 발의건수는 17대 국회가 5.3건인데 비해 18대 국회는 13.5건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18대 국회가 출범하면서 표방했던 ‘일하는 국회’처럼 보인다. 하지만 입법 전문가나 의원들 스스로 ‘거품이 잔뜩 끼었다’는 데 고개를 끄덕인다.

입법조사처 고위 간부는 “열심히 입법 활동을 하는 국회의원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시민단체나 언론에서 발의건수를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다 보니 이를 의식해 건수 늘리기식 법안을 내는 의원이 상당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몇몇 의원은 지난 국회 때 폐기된 법안 중 자구 하나만 고쳐서 낸다”고 했다.

한나라당 A의원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A의원은 “각계 의견을 경청한 후 법안을 구상해 입법조사처나 법제처 도움을 받아 토론회, 공청회 거쳐 상정하고 본회의를 통과하려면 4000건 발의는 말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론 지난 국회에서 자동 폐기된 법안을 재발의하는 것 자체가 비난의 대상은 아니다.

가령 지난해 8월 강창일 민주당 의원이 발의해 국회에 상정돼 있는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은 강 의원이 초선 때인 17대 국회 당시 발의했다가 임기만료로 폐기됐던 법안과 내용이 똑같다. 하도급 대금의 지급기일을 60일에서 40일로 단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법안은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하도급업체들의 실정을 감안할 때 재발의 가치가 충분한 법안으로 평가된다.

지난 국회에서 법안발의 1위를 했던 안명옥 전 한나라당 의원은 “애써 만든 법안이 폐기되는 것이 너무 아깝다”며 “18대 국회에서 현실에 맞게 수정해 재발의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문제는 내용이 부실하거나 무리가 있어 폐기됐고 시급한 경제 현안과 상관없는 법안들이 무더기로 재발의되고 있다는 것이다.

초선인 안효대 한나라당 의원이 발의한 ‘조세범처벌법’이 그런 예다. 이 법안은 지난해 총선에서 낙선한 엄호성 전 의원이 17대 국회 때 발의했다가 폐기된 법안과 제안 이유와 의안 원문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다. 무면허 주류를 제조하거나 판매할 경우 처벌을 3년 이하에서 7년 이하의 징역으로 상향조정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 법안은 ‘조세범처벌법의 형량 체계에 부합하지 않고, 식품위생법에서 다뤄야 할 사안’이라는 소관위원회 평가를 받았었다.

한 가지 더 지적할 문제가 있다. 2007년 이 법안을 공동발의했던 15명 의원 중 9명이 현재도 금배지를 달고 있다. 그런데 이들 9명 가운데 안효대 의원이 재발의한 이 법안 공동발의에 참여한 의원은 2명뿐이었다. 대표발의자나 공동발의자나 법안에 대해 신중히 고민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언론을 탓했다. “언론에서 입법활동을 정량적으로만 계산해 순위를 매기다 보니 의원들이 발의건수 늘리기 경쟁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 발의건수를 가지고 국회의원들의 입법활동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특히 이번 국회가 그렇다.

 

부실 법안·정쟁에 ‘의회 경제 실종’
법안 발의 4000건에 가결률은 10% 안 되는 ‘거품 발의’
쟁점 터질 때마다 대화보단 점거와 농성 되풀이

17대 국회의 경우 헌정 사상 가장 많은 법안이 발의됐지만, 16대 때 폐기돼 재활용할 수 있었던 법안은 본지 조사 결과 726건이었다. 그러나 17대 때 임기만료로 폐기된 법안은 2945건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이번 국회 때 재발의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국회의원 입법 평가에서 법안 발의건수는 의미가 없다.

그런 요인은 또 있다. 한나라당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과 사용 등의 관계에 있는 법인도 처벌하는 ‘양벌규정 개정안’과 관련해 300여 건을 당론으로 제출할 때 홍준표 의원이 216건을 대표발의했다.

지난해 11월 야당의 반발로 이를 철회하고 규제개혁특위로 넘기면서 특위 여야 간사인 이명수 자유선진당 의원, 김종률 민주당 의원, 진수희 한나라당 의원, 정진석 한나라당 의원이 이를 나눠 재발의하면서 발의건수 1~5위를 차지했다. 이런 정황을 무시한 채 발의건수로 순위를 매긴다면 오해가 생긴다.

이런 이유로 2007년 10월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국회의원 299명의 발의건수와 가결률(대안폐기돼 법률에 포함된 발의안 포함)을 전수 조사해 공개했던 이코노미스트는 18대 국회의 특이성을 감안해 ‘입법 순위’를 보도하지 않는다. 류재우 입법조사처 경제산업조사실장 역시 “발의건수 같은 정량적 평가는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법을 만들고 고치는 것이 국회의원의 가장 큰 책무이자 권한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발의건수 순위 의미 없어

이번 국회가 ‘베끼기 법안’ ‘거품 발의’ ‘부실 입법’ 등으로 욕을 먹지만 아예 법을 만들고 고치는 데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의원도 많았다. 정량 평가에 한계가 있다고 해서 국회의원 본연의 임무인 입법 활동에 담을 쌓은 의원들까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난 1년간 단 한 건의 법안을 발의하지 않은 의원은 14명이었다. 발의건수가 1~3건에 머문 의원은 41명이었다. 본인이 대표 발의해 국회를 통과하고 공포된 법이 0건인 의원은 96명이었다. 많은 의원이 발의만 하고 정작 법이 공포되도록 하는 노력은 게을리했다는 것이다. 발의된 4039건 중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379건이다.

가결률이 9%에 불과하다. 자진 철회된 법안은 402건이고, 계류 중인 법안만 2785건이다. 반면 정부가 제출한 법안의 가결률은 45%에 이른다. 17대 국회의 의원발의건수 대비 가결률은 21%였다. 18대 국회가 ‘일하는 국회’라고 보기는 여러모로 힘들다. 그런데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이 있다. 매년 ‘입법 활동’이나 ‘국정감사 평가’ 등 의원 성적표가 시민단체와 언론을 통해 공개되지만, 국회의원이라면 하등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사실 입법 활동과 국회의원이 금배지를 또 달 수 있는가는 별개의 사안이다. 그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 경제정의실천연합(경실련)의 17대 국회 의원 ‘입법 발의 및 가결 종합 평가’에서 20위 안에 든 국회의원 중 몇 명이 이번 국회에서 일할까? 단 5명이다. 20위 안에 든 의원 중 7명은 아예 당내 공천에서 탈락했다.

나머지 13명 중 8명은 총선 출마는 했지만 낙선했다. 대신 입법 활동 하위권(250~299위)이었던 김무성, 김형오, 문희상, 박진, 유승민, 이상득, 정몽준, 정세균, 최연희 의원 등은 금배지를 다시 달았다.

 

‘의정활동 잘한다 8%’


경제위기를 해결하는 데 순발력 있고 탁월했던 법안 하나를 제대로 발견하기 힘든 국회였지만, 파행으로 시작해 당파싸움으로 끝난 지난 1년간의 의정 활동에 비하면 입법 활동은 상대적으로 괜찮게까지 보인다.

세계 경제위기의 먹구름이 우리나라를 덮쳐 오던 지난해 5월 30일 개원한 국회는 원 구성도 못한 채 무려 82일이나 놀고 먹고 싸웠다. 한·미 쇠고기 협상에 반대하는 야권과 정부의 고시 강행으로 시작된 파행은 9월 정기국회로 이어졌다.

신속하고 과감하고 충분히 이뤄져야 할 경기부양책은 국회 정쟁에 가로막혔다. 추경예산안 처리를 놓고 여야가 대립했기 때문이다. 9월 말 이명박 대통령과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여야 영수회담을 통해 ‘초당적 협력’에 합의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싸울 일은 많았다. 10월 국정감사 기간에는 미디어법과 교육세법 폐지 등을 놓고 처음부터 대립하더니, 쌀 직불금 문제와 강만수 전 장관의 헌법재판소 개입 실언이 터지면서 12월 파행 국회를 예고했다. 가뜩이나 상임위 구성이 늦어 준비가 소홀했던 국정감사는 여야 간 파행 속에 피감기관만 함박웃음을 짓게 했다.

국내외 기관에서 ‘마이너스 성장’ 예측이 쏟아지던 12월엔 한나라당이 단독으로 2009년 예산안을 처리하고, FTA 비준안을 단독 상정하자, 민주당이 전체 상임위 회장과 국회의장실을 점거했다. 본회의장은 12일, 국회의장실은 14일 동안 점거했다. 이때 18대 국회 1년을 상징하는 해머와 전기톱, 소화기가 등장했다.

이를 전후해 여야를 가릴 것 없이 ‘건’만 생기면 국회의원들이 농성에 돌입하는 버릇이 생겼다. 파행은 계속됐고, 여야는 4월엔 고작 5명 뽑는 재·보궐 선거에 올인했고, 5월 들어 당 대표를 뽑는 내분에 휩싸였다.

국민은 모든 것을 똑똑히 지켜봤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지난 19일 전국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례 여론조사 결과, 18대 국회 의정활동 평가 결과에서는 ‘국회의원들이 의정활동을 잘하고 있다’는 평가가 8%에 그쳤다. 국회는 뒤늦은 반성 중이다. 한 여당 초선 의원의 반성문을 들어보자.

“기업과 노조가 상생을 위해 손을 맞잡고, 사원들은 월급 나누며 공생을 몸부림치고, 경제살리기에 온 국민이 서로 양보하며 힘과 지혜를 모으고 있을 때 국민 고통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이 초선 의원인 바로 저다. 세비 매달 잘 받고, 후원금 넉넉히 모으고, 당선 축하연과 환영연 화려했으며, 특권층 예우와 대접 깍듯이 받았다.

하지만 일도 그렇게 잘했을까 생각하면 부끄럽다. 경제살리기 법안이나 대안에 집중 안 했고, 화합보다 분열 언행이 더 많았으며 바람직한 정치경쟁 하지 못했고, 민생 챙기기보다 정쟁의 거수기 노릇에 충실했다.” 예전 국회도 그랬지만 “국회의원들은 하나하나 만나면 다 정의롭고 똑똑하고 열의가 넘치는데 뭉치기만 하면 이상해진다”는 비판이 지겹지도 않을까?

언제까지 ‘식물국회’ ‘부실국회’ ‘떼거리 정치’ 소리를 들을 참인가? 국회엔 이미 국회를 정상화하자는 수많은 아이디어가 쌓여 있다. 상시 국회제 도입, 법안 자동상정, 국회의장 직권상정 금지, 법사위 권한 축소, 상임위 중심의 국회 운용, 원내대표 권한 축소, 상시 국감제, 강제적 당론 금지, 상향식 공천제 금지….

점거와 농성과 몸싸움 속에서도 4000여 건이나 법안을 발의한 국회라면 산적한 경제 법안을 신속히 처리하면서 국회를 정상화시킬 수 있는 논의를 할 수 있다. 맹탕 법안 늘리기 경쟁을 그만두면 시간은 더 많아진다. 그래야 경제가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