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WHY? 저속 전기차 배터리 방전됐다서울시 운행제한구역 3%가 발목 잡아 …

도일 남건욱 2010. 10. 17. 15:19
WHY? 저속 전기차 배터리 방전됐다
서울시 운행제한구역 3%가 발목 잡아 … 공공부문 전기차 공급도 여의치 않아
이윤찬 기자 chan4877@joongang.co.kr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에 사는 직장인 A씨. 그는 최근 큰맘 먹고 경차 대신 저속 전기자동차(최고 시속 60㎞ 미만)를 샀다. 경차 가격보다 훨씬 비싼 2000여만원을 미련 없이 쏟아부었다. 주판알을 튕겨 보니 몇 년 후엔 남는 장사가 될 게 틀림없었다. 휘발유 값을 줄일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하루 주행거리를 40㎞로 가정했을 때 저속 전기차의 충전요금은 약 2만원에 불과하다. 저속 전기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서울시 전체의 97%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웬걸.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다. A씨의 직장은 영등포역 지하상가. 차량 정체가 없으면 20여 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가장 가까운 교통로인 서강대교는 진입 불가. 강변북로를 탈 수도 없다. 직장으로 가기 위해선 신촌을 거쳐 양화대교를 이용하거나 마포대교를 건너야 한다. 가까운 길을 두고 빙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애써 구입한 저속 전기차는 졸지에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저속 전기차 구입자에게 언제든 생길 수 있는 가상 시나리오다.

중소 전기차 생산업체가 요즘 울상을 짓는다. 저속 전기차의 운행은 여의치 않고, 판로는 꽉 막혔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현실을 외면한 법적용이 첫째 문제라는 지적이다. 이명박(MB) 대통령의 ‘전기차 시대를 준비하자’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국회는 2009년 12월 자동차 관리법에 ‘저속 전기차에 대한 특례규정’을 신설했다. 시속 60㎞ 이하 도로에서 저속 전기차의 운행을 허용한 것이다. 이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저속 전기차는 시내를 주행할 수 없었다.

누가 지시했든 여기까진 좋았다. 언뜻 보면 중소 전기차 업체에 유리하다. 사례에서 언급했듯 서울시에서 저속 전기차가 다닐 수 있는 곳은 100%에 육박한다. 가격경쟁력도 충분하다. 저속 전기차는 일반적으로 고속 전기차보다 50%가량 싸다. 현대차가 최근 출시한 고속 전기차 ‘블루온’의 시장 추정가격은 4000만~5000만원. AD모터스의 저속 전기차 ‘체인지’는 1880만원이다. 동등하게 도로를 질주한다면 저속 전기차도 가능성이 있다.

일부 대교 못 건너는 저속 전기차
하지만 실상은 크게 다르다. 저속 자동차의 운행금지 구간인 3%가 문제다. 서울의 강변북로·올림픽대로에선 저속 전기차가 다닐 수 없다. 동부·서부·남부·북부 간선도로도 진입 불가다. 몇몇 순환로 역시 운행이 불가능하다. 저속 전기차론 서울시 동서남북을 가로 짓기 어려운 셈이다. 오토바이와 다를 바 없다. 여기에 시흥대로(시흥IC~구로디지털단지입구 삼거리) 등 중소기업 직장인이 많이 이용하는 몇몇 도로에선 저속 전기차를 운행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우회도로를 택해야 하는데 이를 받아들일 소비자가 많을지 의문이다.

정부는 이상할 게 없다고 말한다. 안전을 위해 저속 전기차의 운행구간을 제한했는데 뭐가 문제냐는 거다. 늦은 밤 저속으로 달리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미국도 주(州)별로 저속 전기차의 운행구간을 규제한다는 주장도 있다. 국토해양부의 한 관계자는 “미국 일부 시(市)에선 저속 전기차의 운행구간을 별도로 정해 놨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소 저속 전기차업체 연구원은 반론을 폈다. “미국에서 저속 전기차는 말 그대로 가까운 거리를 이동하는 차다. 교외로 나가지 않는다. 우리 현실과 크게 다르다. EU(유럽연합), 일본 등 저속 전기차의 운행구간을 탄력적으로 정하는 국가도 많다.”

 

국내 자동차관리법도 사실 저속 전기차의 운행구간을 교통상황·흐름을 판단해 (지자체 장이 탄력적으로)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자체는 60㎞ 이하 구간의 운행을 일률적으로 제한했다. 이 과정에서 교통상황·흐름은 꼼꼼하게 따지지 않았다. 그러니 일부 대교를 저속 전기차가 진입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생긴 거다. 출퇴근 시간이면 속도가 뚝 떨어지는 도로에 저속 전기차가 진입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익명을 원한 저속 전기차업체 관계자는 “저속 전기차는 출퇴근용으로 활용해야 가치가 있다”며 “저속 전기차 운행금지 구간이라도 일정 시간엔 주행할 수 있도록 제한을 푸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운용의 묘를 발휘해 달라는 당부다.

중소 저속 전기차업체가 시름시름 앓는 이유는 또 있다. 판로 때문이다. 저속 전기차업체의 1차 타깃은 정부·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이다. 고속주행이 필요 없는 인천공항 등에선 저속 전기차가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하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다. 대기업도 정부·지자체·공공기관을 주요 소비자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2012년까지 정부·공공기관 등에 고속 전기차 2500대를 공급할 예정이다. 르노삼성·GM대우도 내년부터 전기차 시장을 본격 공략한다. 대기업의 고속 전기차가 출시되지 않았을 때도 별다른 실적이 없었던 중소 전기차업체로선 발 붙일 틈이 더 좁아진 셈이다.

전기차 만들라면서 지원책은 없어
저속 전기차업체 관계자는 “보조금 정책이 빨리 추진됐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대기업의 고속 전기차가 출시되기 전 보조금을 유인책으로 저속 전기차를 (정부·지자체·공공기관에) 공급했다면 시장을 먼저 장악했을 거라는 얘기다. 정부는 전기차 보조금 정책을 내년부터 추진할 계획이다. 공교롭게도 내년은 블루온이 본격 양산되는 시기다. 마치 대기업이 고속 전기차를 양산할 때까지 보조금 정책을 미룬 것처럼 보인다. 이는 해외 국가와 다른 점이다. 미국은 저속 전기차 한 대당 최대 2500달러(약 280만원)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중국은 저속·고속 구분 없이 연료 절감 효과에 따라 최대 6만 위안(약 1000만원)을 보조한다. 국내 저속 전기차업체가 얼마나 외면 받았는지 엿볼 수 있는 사례다.

MB는 지난 9월 현대차 블루온을 시승한 직후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만든 우리 전기차가 (일본 것보다) 더 우수하다면 대단한 결과다 … 이번 전기차가 대기업과 중견기업, 중소기업이 힘을 합쳐 만들었고, 서로 보완하고 협력하는 모습에 의미가 있다….” 하지만 몇몇 중소 전기차업체의 배터리는 방전되고 있다. 대기업-중소기업 상생을 말하기 전 냉혹한 현실부터 짚어 보는 게 순리다. 계륵으로 전락한 중소 전기차업체의 실상을 제대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말과 정책 그리고 법안은 알곡 없는 쭉정이와 다를 바 없다. 위에서 본 세상과 아래에서 겪는 현실의 괴리는 언제나 큰 법 아니던가.

김필수(자동차공학) 대림대 교수의 일침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현재 저속 전기차업체의 경우 국내 기반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공장 등 기반을 옮기는 고민을 하고 있다. 이제라도 정책적 근간을 바꾸어 전체를 아우르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