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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거리는 넘치지만 생산 과정을 속속들이 알고 나면 입맛이 뚝 떨어지는 음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만든 사람은 못 먹는’ 음식이 즐비한 세상에서 직접 기른 채소로 사람을 살리겠다고 선언한 농부 CEO가 있다. ‘활인채소’를 지향하는 류근모(52) 장안농장 대표다.
3월 26일 정오, 충북 충주에 위치한 장안농장을 찾았다. 국내 최대 규모의 쌈 채소 농장인 이곳의 점심 메뉴는 여느 회사 내 식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큰 접시에 각종 쌈 채소가 수북이 쌓인 것 외에는. 류근모 대표는 밥 한 술 뜰 때마다 상추·케일·치커리 같은 채소를 여러 번 베어 먹었다. ‘아삭’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는 그를 보니 절로 시장기가 돌았다.
42만9000㎡(13만평) 규모의 장안농장에선 100여 종의 쌈 채소가 자란다. 적상추·청상추를 시작으로 이름도 생소한 토스카노·청오크립·비타민 등 세상에 쌈 채소는 다 모아놓은 듯하다. 1년 내내 40만주의 모종이 자란다. 류근모 대표는 “연중 어느 때 와도 최소 50~60가지 채소를 맛볼 수 있다”면서 “방문객이 직접 농장에서 쌈 채소를 수확해 맛 보는 봄 축제는 올해로 16회째”라고 말했다. 농장 내 공원·박물관·연구소·체험농장 등 모든 시설은 쌈 채소를 주제로 한다.
고부가 한정판 제품 만들어
1997년 서울에서 하던 조경사업 실패 후 류 대표는 그야말로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 아내의 권유로 300만원을 융자 받아 귀농했다. 부지 1만3200㎡(4000평)을 매입한 게 장안농장의 시작이었다.
“달리 살 방도가 없어 택한 귀농이라 실패의 연속이었죠. 처음엔 감자와 땅콩 농사를 했는데 별 준비 없이 뛰어들어서 보기 좋게 망했죠. 초기 자본이 적게 들고 수확기간이 짧은 작물을 찾다가 상추를 택했어요.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한 요구가 높아질 때라 유기농 채소를 재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친환경농법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족할 때 고향 선배를 따라다니며 농사일을 배웠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았고, ‘그냥 (농약) 한번 칠까’하는 유혹에 시달린 적도 있었단다.
“한여름에 비닐하우스 내부 온도는 60도까지 올라가요. 일일이 손으로 잡초를 뽑고, 벌레를 잡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히죠. 6000원짜리 농약 한방이면 금방 잡초가 사라지는데 그 고생을 하다 보면 농약에 손이 절로 가요. 그런 저를 아내가 말렸어요. 농약 없이 기르느라 고생한 시간이 아깝다면서요.”
화학비료와 농약 대신 목초액·현미식초·막걸리·담뱃잎을 섞어 뿌렸다. 밤에 출몰해 잎사귀를 갉아먹는 민달팽이를 잡느라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하우스 내부 온도를 조절하기 위해 하루에도 열 번 이상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친환경 농법의 노하우를 익혔다. 퇴비 문제는 유기축산으로 해결했다. 장안농장 안에는 유기농 한우방목장이 있다. 28마리의 한우가 50평의 운동장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닌다. 농장에서 재배한 유기농 채소를 먹은 소의 배설물로 밭에 줄 거름을 만든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이런 순환농법을 써서 농사를 지었어요. 근데 이런 방식을 하려면 화학비료보다 10배 이상 돈이 들어가요. 직접 소를 키우고, 방목장이나 퇴비를 발효시킬 공간도 필요하니까요. 웬만한 영세 농가는 엄두도 못 내죠. 오죽하면 퇴비 문제를 해결해야 유기농이 산다고 하겠어요.”
조상들의 순환농법 그대로 농사를 짓는 류 대표이지만 마케팅만큼은 여느 대기업 브랜드 못지 않다. 류 대표는 쌈 채소를 ‘명품’이라고 불렀다. 장인의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해 기른 작물이니 달리 명품이 없다는 설명이다. 그런 장안농장에서도 ‘명품 중의 명품’을 꼽으라면 단연 250g에 5만원 하는 ‘부활상추’다. 1년에 한번, 그것도 예약해야만 부활절에 맞춰 맛볼 수 있는 ‘한정판’이기도 하다.
“부활상추는 11월에 심어서 이듬해 봄에 돋는 새순만 수확한 것입니다. 겨우내 추위에 완전히 노출된 채 수확하지 않으니 얼어 죽습니다. 그런데 영하 25도를 밑도는 온도에서도 뿌리만은 살아있는 거죠. 잎새는 완전히 죽되 완전히 죽지 않는 게 관건이에요. 사실 이 과정에서 90%는 다 죽고 10%만이 상품 가치를 갖게 되죠.”
대표는 “추위를 이기고 자란 상추는 1000년 전 고려시대 ‘천금채’보다 더 건강한 먹을거리”라면서 “그만한 투자를 해 무엇보다 자신 있는 상품이기에 비싼 값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품질과 스토리가 접목된 채소는 물론 야채스프·양배추즙·장안식탁(배달사업)과 같은 부가사업 덕에 이 농장의 연 매출액은 130억원에 이른다. 8월에는 한 자리에서 100가지의 채소를 맛볼 수 있는 유기농 쌈밥집도 열 예정이다.
규모가 커지고 주문량이 늘기 시작하자 류 대표는 공급을 안정적으로 늘리기 위해 주변 농가와 함께 재배하기 시작했다. 2004년 10곳의 협력농가를 묶어 유기농 영농조합법인을 설립했다. 협력 농가에 유기농 재배 비법도 모두 공개했다. 현재 장안농장의 협력농장은 전국 67곳에 달한다.
업계 최초로 혁신인증 받아
“농부의 가장 큰 고민이 판로 개척이에요. 특히 친환경 농산물은 일반 농산물보다 판로가 좁아서 더 힘들죠. 제가 판로를 책임지고, 재배 기술도 전수한다고 하니 여러 농가가 손을 내밀더군요. 생산·판매·배송 등 제반 분야에 걸쳐 규모가 작을수록 비용은 늘고 수익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경쟁력을 갖추려면 규모를 키워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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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가 기업 인증 받는다고 했을 때 엄청 손가락질 받았어요. 농부가 농사만 잘 지으면 되지 쓸 데 없는 짓 한다고요. 지금까지 농사는 씨 뿌리고 가꿔서 수확하면 끝이었죠. 근데 그렇게 해서 돈 버는 농가가 몇 군데나 된답니까. 이젠 채소도 가공하고, 디자인해야 하는 시대에요. 유통과 판매에도 나서야 하고요. 이 모든 과정을 한번에 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농업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 자신도 농부이자 2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CEO다. 류 대표가 택한 경영방식은 예술 경영이다. 그는 “같은 물건 하나라도 장사꾼이 만드는 것과 예술가가 만드는 건 다르다”면서 “직원들에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을 만든다는 심정으로 생산은 물론 포장, 선별 작업까지 해달라고 강조한다”고 말했다.
전국 56개 이마트 매장과 패밀리레스토랑, 급식업체, 농협 등에 공급하는 장안농장의 경영은 체계적이다. 현재 류근모 대표가 추진하고 있는 건 ‘3농부 운동’이다. 농산물을 생산하는 ‘생산농부’, 그 농산물을 판매하는 ‘판매농부’, 우리 농산물을 구입하는 ‘소비농부’가 늘어나야 우리 농업이 설 자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어요. 단순한 농법으로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면 FTA는 재앙이겠지만 차별화 전략과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을 생산하면 기회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게 시장 논리를 따르는 데 농업만 시장 울타리 밖에서 볼멘소리를 할 순 없어요. 이제껏 정부 보호를 받는 걸 당연시 하다가 농부 스스로 자구책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농업이 퇴보한 거죠.”
류 대표는 “농업인은 농업도 곧 경영이라는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면서 “정부도 농업을 기간산업이나 벤처산업으로 여기고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년에 최소 300권 이상의 책을 읽는단다. 농업인 만큼 많이 공부해야 하는 직업이 없기 때문이란다.
“농업을 한물 간 산업으로 여기는데 오히려 발전 분야가 무궁무진해요. 농부가 공부하면 상추가 잘 자라느냐고요. 정말 잘 자라요.(웃음)”
허정연 이코노미스트 기자 jypow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