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서 운행 거리나 가격에 불만이 많다는 걸 감안했다.” 가타기리 타카오 닛산자동차 부사장의 말이다. 닛산은 올 1월 중순 전기자동차(EV) ‘리프’의 가격을 내린다고 밝혔다. 4월부터 당초 가격보다 28만엔 싸게 판매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보조금까지 더 하면 사양에 따라 100만엔대 후반에서 200만엔대 중반이면 구입할 수 있다.
닛산은 미국에서도 리프의 가격을 내린다. 리프는 지난해 11월 마이너 체인지(부분 모델 변경) 후 최근 내놓은 새 차다. 새 모델의 가격을 출시 2개월 만에 내리는 건 이례적이다. 리프 판매와 관련된 닛산의 위기감이 반영됐다.
운행거리 짧고 충전소 부족해 안팔려
리프는 2010년 12월 세계 최초로 대량 생산에 들어간 EV다. 엔진자동차를 대신하는 EV 시대의 개막을 알리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최근 2년 간 판매량은 저조하다.
누적 판매 대수는 지난해 말까지 일본에서 2만1000대에 그쳤다. 글로벌 시장 전체로 따져도 5만대에 못 미친다. 닛산이 발표한 생산 능력의 절반 수준이다.
리프를 비롯한 친환경 자동차 사업을 총괄하는 와타나베 히데아키 집행임원은 “이례적인 시기에 가격을 내린 건 EV를 틈새시장에 머물지 않도록 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리프는 마이너 체인지로 차체의 무게를 80㎏ 줄이고 모터도 개량했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 전력을 아껴 운행 거리도 늘렸다. 완전 충전 때 공시된 운행 거리는 이전보다 14% 늘어난 228km이다. 또 난방을 켤 때 전력소비를 줄이려고 히트 범프를 채용했다. 그 덕에 실제 운행 거리는 공시보다 더 길다.
운행거리가 짧은 EV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충전 인프라 정비에도 힘을 쏟았다. 현재 급속 충전기는 일본 전역에 1400여개뿐이다. ‘충전 불가능’에 대한 불안감은 EV 보급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닛산은 판매점을 중심으로 급속 충전기 설치를 늘렸다. 급속 충전기가 설치된 판매점은 리프 출시 당시 200개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700개 가량 된다.
스미토모상사나 NEC와 손 잡고 급속 충전소 운영사 설립도 추진한다. 정유 사업자와 제휴를 확대할 예정이다. 공공시설·편의점처럼 충전기 설치에 관심이 있지만 운영에 불안감을 가진 사업자에 대한 시장 조사도 시작했다. 마침 좋은 소식도 들려 왔다. 충전 설비 설치에 대한 국가 보조금이 늘었다.
2012년도 보정 예산에 1005억엔이라는 엄청난 금액이 반영됐다. 경제산업성은 이를 통해 내년 3월까지 일본 전역에 급속 충전기를 3만6000대, 보통 충전기를 7만4000대까지 늘릴 방침이다.
EV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노력도 강화했다. 그중 하나는 판매점에서 리프를 수일에서 1개월 가량 대여해 주는 ‘장기 모니터 캠페인’이다. 약점인 운행거리도 시내 중심의 주행이라면 캠페인 진행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제로 장기 모니터 캠페인을 이용한 고객의 리프 구입률이 그렇지 않은 고객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와타나베 집행임원은 “단점이 강조되기 쉬운 EV지만 일상 생활에서 고객이 장시간 사용해 보고 장점을 실감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리프는 일본에서만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영국에서도 지난해 말부터 리튬이온 전지 생산을 시작했고 올해부터는 리프를 생산한다. 미국·영국에서 연간 26만대의 생산 능력을 갖췄다. 내년에는 ‘e-NV200’ ‘인피니티EV’ 등 신형 모델도 투입한다. 기술 개발과 더불어 양산 효과를 높여 배터리·모터 같은 주요 부품 가격도 절반으로 줄일 계획이다. 이에 따라 2018~2020년이면 EV 보급이 급격히 늘 것으로 본다.
다른 회사의 전략은 좀 다르다. EV 보급에 많은 힘을 기울이진 않는다. 닛산에 앞서 2010년 4월 소형 EV인 ‘i-MiEV’를 내놓은 미쓰비시자동차는 2011년 밴형 EV‘MINICAB-MiEV’를 선보였다. 그러나 지난해까지 세계 누적 판매 대수는 2만3000대에 그쳤다. 올 들어 트럭형 EV 판매도 시작했지만 이 역시 부진하다. 그래서 플러그 하이브리드자동차(PHV)나 하이브리드자동차(HV) 개발로 방향을 틀었다. EV는 기술 확보 차원에서 현상만 유지하는 모양새다.
도요타·혼다자동차 같은 대기업도 전지·모터 등 전동화 기술 개발에 전력을 쏟지만 EV 개발에는 회의적이다. 혼다는 지난해부터 EV ‘피트’를 전 세계에서 팔았다. 그러나 소수 임대 판매에 머물렀다. 도요타 역시 지난해 소형 EV ‘eQ’를 내놨지만 판매 대수는 100대 정도다. 일반 판매는 하지 않아 EV에서 거의 손을 뗀 모습이다.
혼다의 4륜기술 개발을 담당하는 아라이야스히사 전무는 “일반 승용차와 비교할 때 EV는 운행 거리가 매우 짧다”며 “EV로 어떤 상품을 만들면 좋을지 제조사도 이용자도 헤맨다”고 분석했다. 그나마 초소형은 승부를 걸 만하다. 혼다가 상대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EV는 단거리 전용의 2인승 초소형차다.
지난해 출시한 초소형 EV는 용도에 맞춰 바디 타입을 간단히 교환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자녀 배웅이나 고령자의 이동, 택배에 맞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도요타 역시 이미 초소형 EV ‘콤스(COMS)’시판을 앞두고 있다. 닛산도 르노의 초소형 EV를 도입해 요코하마에서 실험하고 있다. 국토교통성이 EV 보급을 목적으로 초소형차에 대한 새로운 규격을 확정해 정책적 지원도 늘렸다.
자동차 대기업이 주춤하는 사이 벤처기업이 앞다퉈 EV에 뛰어들었다. EV는 전지·모터·인버터 같은 부품을 조립하면 쉽게 만들수 있다. EV는 가솔린차보다 진입장벽이 낮다. 기회를 잡으려는 벤처기업도 나서고 있다. 게이오대의 심‘ 드라이브’는 EV 벤처의 대표격이다.
게이오대 교수인 시미즈 히로시 사장이 나서 2009년 설립했다. 다른 기업이나 지자체와 제휴하고 EV를 개발한다. 30개 참가 기업으로부터 각 2000만엔씩 후원받은 6억엔을 연구에 투자한다. 지금까지 1년에 1대 수준으로 2대를 제작했다. 현재 3호 개발을 마쳤다. 3월에 이를 발표한다.
대기업 부진에 벤처업계 도전 나서심드라이브가 개발한 EV의 특징은 바퀴에 모터를 내장하는 인호일 모터 방식으로 구동한다는 점이다. 동력 전달 손실을 줄여 효율이 좋다. 실내 공간도 넓어졌다. 시미즈 사장은 “EV에 가장 합리적인 기술”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2호 EV인 ‘심윌’은 1회 충전으로 351km를 달린다.
EV로 최고 수준의 운행 거리다. 심드라이브는 기술뿐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도 특이하다. EV 개발에 자동차의 틀을 넘어 소재·전기·주택 등 다양한 업종의 제조사나 상사가 참여했다. 이들은 기술정보를 전부 공유하는 ‘오픈 소스’방식을 택했다. 이로부터 얻은 기술이나 노하우를 기반으로 각각 EV의 제조·판매에 활용한다.
일본 돗토리현 요나고시에 본사를 둔 ‘나노 옵토닉스 에너지’는 1~2인승의 초소형 EV 양산이 목표인 벤처기업이다. 다케우치 미키오 사장은 “차 자체로는 차별화가 어려워 대형 자동차 메이커에 대응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EV 가 아닌 ‘EV를 활용한 서비스’로 차별화를 노린다.
이 회사는 초소형 EV 50대를 사용한 카셰어링(Carsharing) 실험을 요나고시 중심부에서 시작한다. 소유 대신 이용의 개념을 도입해 중심 시가지에서 고령자가 EV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올해 1월 국토교통성은 초소형차의 공공도로 주행을 인정하는 제도를 신설하고 실험에 대한 보조금도 지원하기로 했다.
교토에 본사를 둔 ‘그린로드모터스’는 2인승 EV 오픈스포츠카 ‘토미카이라’를 올 초 내놨다. 토미카이라의 특징은 차대(플랫폼)와 외장을 나눠 따로 생산한다 점이다. 차대부분은 충분한 강성·강도가 필요하지만 외장은 경량 소재로 만들어도 상관없기 때문에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그린로드모터스는 이 방식으로 순수 스포츠카를 만들면서 차대만을 따로 판매하는 사업 계획도 세웠다.
빈티지 EV를 개발하는 ‘오즈(OZ) 코퍼레이션’도 주목 대상이다. 후루카와 오사무 사장은 “1960~1970년대의 빈티지카는 디자인이 뛰어나지만 배기가스나 소음 문제가 있고 낡은 기계구조 때문에 달리고 싶을 때 움직이지 않는다”며 “이런 문제점을 ‘EV화’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 조립·제작하는 ‘DIY’개념을 도입해 낡은 차를 누구나 쉽게 EV로 바꿔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아직은 정비업계에서 기대감을 보이는 수준이지만 자동차 개조 시장에 본격 진출하면 일반 소비자의 관심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존재감 커진 연료전지 자동차도요타·혼다는 엔진자동차를 대체할 차세대 자동차로 연료전지자동차(FCV)를 꼽는다. 엔진의 연비 효율을 높이고 HV·PHV를 강화하면서 기술을 축적해 FCV를 만드는게 이들의 로드맵이다. FCV는 수소와 산소의 화학반응으로 전기를 만드는 연료전지(FC)를 동력원으로 하는 자동차다. EV와 달리 운행 거리에 문제가 없고, 폐기물도 물이라 친환경적이다. FCV 도입은 10년 전부터 준비해 기술적인 과제는 거의 해결됐다.
도요타와 혼다 모두 2015년에 일반인 대상으로 시판할 계획이다. 수백 만엔 수준의 비싼 가격과 부족한 수소 충천 인프라 때문에 보급에 한계가 있지만 2030년대 초반 무렵에는 판매가 늘 것으로 본다. FCV는 도요타가 독일 BMW와 공동 개발한다. 미국 GM과 한국의 현대자동차도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닛산과 독일 다이무라, 미국 포드도 2017년 시판을 목표로 공동 개발에 착수했다. 장기적으로 FCV가 대세가 될 전망이다.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 EV가 틈새시장에 머물지 하나의 큰 세력을 구축할 지 갈림길에서 있다.
- 일본 경제 주간지 동양경제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