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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s.joins.com/ui_joins/magazine07/btn_zoom.gif) 앤서니 퀸(오른쪽)이 열연한 영화 ‘희랍인 조르바’의 한 장면. |
세상의 지혜는 책에만 있지 않다. 두꺼운 안경을 쓴 책 벌레보다는 하루하루 삶과 맞닥뜨려 산 막노동꾼이 더 많은 세상살이의 지혜를 지닐 수 있다. ‘나’는 책벌레고, ‘막노동꾼’은 조르바다. 조르바는 실존인물이다.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1917년 펠로폰네소스에서 함께 탄광사업을 했던 사람이다. 호메로스·베르그송·니체·부처에 심취한 카잔차키스가 지성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조르바와 어울리면서 겪은 경험을 책으로 엮었다.
조르바의 호탕함에 매료돼 현장감독 시켜
『그리스인 조르바』하면 떠오르는게 자유다. 『갈매기의 꿈』에서 조나단이 그렇듯 언제나 훌훌 하늘로 날아갈 수 있는 자유의 심벌이 조르바다. 조르바는 흥겨우면 전통악기인 산투르를 켜고, 더 즐거우면 눈치보지 않고 맘껏 춤을 춘다. 이야기는 ‘나’의 시각으로 풀어나간다. 나는 피레에프스라는 그리스 아테네의 항구도시에서 조르바를 만난다.
그날은 비가 내렸고 나는 크레타섬으로 가기 위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테의 신곡을 읽으려 하는 순간 인기척을 느껴 뒤를 돌아보니 ‘키가 크고 몸이 호리호리한 60대 노인이 납작해진 보따리 하나를 겨드랑이에 낀 채’ 유리창문밖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는 다짜고짜 말한다. 크레타 섬으로 자신을 데려가라고. 그의 이름은 알렉시스 조르바다.
나에겐 유산으로 받은 크레타섬의 갈탄광산이 있다. 조르바의 호탕한 말에 매료된 나는 그를 광산의 현장감독으로 고용한다. 인부들을 감독하는 역할이다. 조르바가 말한다. “일은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하지요. 거기서는 당신이 내 주인이니 말이요” 조르바는 금세 크레타섬에 녹아 든다.
조르바는 ‘남성 욕구’를 숨기지 않는다. 여성에 대한 구애도 적극적이다. 카바레 가수 출신인 여관주인인 오르탕스 부인을 금세 자기사람으로 만든다. 금욕주의자인 나는 조르바를 흥미롭게 바라보지만 결코 행동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마을사람들이 탐내는 젊고 아름다운 과부 소멜리아는 친절하면서 신사적인 나에게 마음을 열고, 밤을 함께 보낸다.
하지만 소멜리아를 짝사랑하던 마을 청년 파블리가 상심해 자살을 하고, 파블리의 아버지는 소멜리나를 칼로 찔러 죽인다. 광산사업이 실패하고 나는 크레타섬을 떠난다. 조르바도 떠난다. 조르바는 루마니아·시베리아·베를린으로 돌아다닌다. 5년 뒤 나는 세르비아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조르바가 죽었다고.
나와 조르바는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계약관계다. 책밖에 모르는 나는 조르바에게 광산에 대한 모든 걸 일임했다. 일꾼들을 감독할 권한, 광산을 개발할 권한까지도. 조르바는 광산에서 일도 해봤고, 사람을 다루는 법도 잘 안다. 다만 나는 사업의 목표가 분명하다. 만약 갈탄광산이 성공할 경우 함께 고생한 인부들과 모든 것을 나눠 갖고 형제처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 공동체사회를 만들고 싶다.
아테네의 이 갈탄광산은 기업은 전문경영인(CEO)에게 맡기고 오너는 뒤로 물러선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형태다. 이 갈탄광산은 소유·경영 분리의 아주 이상적인 모델이다. ‘나’는 조르바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조르바도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내가 인부들을 만나 인간적인 이야기를 나누려 하자 조르바는 “위계질서가 무너지면 통솔하기 힘들다”며 손사래를 칠 정도다. 나도, 조르바도 목표는 똑같다. 갈탄광산이 성공했으면 싶은 거다.
하지만 현실에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는 종종 ‘주인과 대리인’ 문제를 발생시킨다. 주인과 대리인 문제란 주인과 대리인의 이해관계가 달라서 발생하는 문제를 말한다. 국가와 국민, 오너와 전문경영인, (오너가 없을 경우) 전문경영인과 주주, 의뢰인과 변호사, 사장과 근로자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다.
주주와 전문경영인 간의 관계를 보자. 전문경영인은 자신의 재계약을 위해 단기 성과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장기적인 성과보다는 무리하게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려 하는데 이게 꼭 기업에 득이 되지 않는다. 성장 잠재력이 있는 분야를 팔아 매각 차익으로 순이익을 높였을 경우 잘했다고만 말하기 힘들다. 이 경우 경영지표만 보면 CEO의 몸값이 올라가겠지만 장기적으로 기업의 상황은 나빠질 수 있다.
회장 보고용 장부 따로 만든 전문경영인
주인과 대리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두 사람이 가진 정보가 똑같지 않은, 정보 비대칭 때문이다. 사장은 근로자가 공장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전부를 알 수 없다. 일하는 중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지, 잠을 자는지, 인터넷을 하는지 일일이 감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보가 많은 쪽은 정보가 적은 쪽을 이용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만약 사전적 정보 비대칭이라면 역선택이 일어난다. 오너가 전문경영인을 고용할 때 그의 몸값을 과도하게 높게 주거나, 적절치못한 전문경영인을 뽑을 수 있다. 사후적 정보 비대칭은 도덕적 해이로 나타난다. 막상 뽑아놓은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위해 제대로 일하는지 알 수 없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무너진 모 그룹은 사장용 회계장부와 그룹 회장용 회계장부가 따로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회사의 경영상태가 나쁠 경우 바로 해고될 수 있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실제와 다른 회계장부를 만들어 그룹 회장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정부와 국민과의 관계를 본다면 정권의 실세나 그 가족들이 대규모 국책사업에 참여해 막대한 이익을 남기려는 행위가 대표적인 ‘주인-대리인 문제’로 볼 수 있다.
주인-대리인 문제를 없애기 위해서는 정보의 불균형을 없애는게 최선이다. 기업의 외부감사를 강화해 전문경영인이 비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 대표적인 방법이다. 또 공시나 정보공개를 강화해 고용주와 피고용주(혹은 국가와 국민)간 소통 채널을 확보하는 것도 필요하다.
인센티브제를 적절히 활용하는 방안도 있다. 성과급제를 강화해 성과에 따라 경제적 보상을 달리하는 방법이다. 기량이 확인되지 않은 용병선수들에게 일정 성적을 내면 추가적인 성과급을 주는 ‘옵션’계약은 프로세계에서 흔하다. 미국 LA다저스에 스카웃된 류현진 선수도 170이닝 이상 던지면 추가적인 성과급을 받는 계약을 했다. 막대한 돈을 받고 입단한 용병선수가 일부러 열심히 뛰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조르바와 계약을 하면서 이런 보완장치를 하지 않았다. 조르바의 인생관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조르바 역시 자신을 믿어주는 ‘나’의 순수함을 존경해 최선을 다했다. 돈을 몽땅 써버린 조르바를 만나러 가는 길, 나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서술한다. ‘나는 화를 내려고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화를 내 보려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주먹도 쥐어보고 화난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모두 해봤지만 잘 되지 않았다. 화가 나기는커녕 오두막이 가까워 질수록 가슴이 벌렁거렸다’.
고용주와 피고용주의 마음이 이렇게 맞는다면 가장 이상적인 궁합이다. 대기업 핵심 보직에 총수의 직계가족들을 앉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돈 앞에 인간이 그리 이타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다. 심지어 가족까지도 말이다. 이 작품은 1946년 발표됐다. 그리스정교회는 신성모독적이라며 작품 출간을 금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자 카잔차키스는 1951년과 1956년 두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면서 그리스를 대표하는 지성으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