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박사님이 읽은 책

플라톤의 이미지

도일 남건욱 2013. 11. 16. 10:29

플라톤의 철학에서 모방이론을 흥미롭게

공부하였던 적이 있는데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글을 보내드립니다.
1. 이미지의 최대 적은 두말할 나위 없이 플라톤이다.
그는 현상이 지배하는 감각의 세계와 진리가 존재하는 
이데아의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고,
감각은 이데아에 이르는 철학적 통찰을 왜곡하고
굴절시킬 뿐이라고 질타하였다.
2. 그가 이미지를 비난하는 이유는
철학적 통찰은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지만
현상과 환상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릴 뿐이라는 것이다.
종종 오해되는 플라톤의 철인 왕은 사실 ‘이성이 지배해야 한다’는
전통 인문학의 핵심 명제를 구체하한 것이다.
3. 그런데 이 이성 지배의 당위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욕망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는 인식이
더욱 더 강렬하게 고개를 쳐든다.
이데아의 최대 적은 역시 욕망과 환상이 빚어내는 현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철학과 시 사시에는
오래된 일종의 불화(diaphora)가 있다“고 단언한다.
4.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 내면에는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보려고 하는 천성이 내재하고 있다.
우리의 감각은 보이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고, 이러한 경향은 결국 영혼을 혼란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이 이러한 감각의 경향을
이용하고 강화하는 예술을 
‘요술’ 또는 ‘마법’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5. 디지털 정보기술은 실제로 이미지를 현실보다 더 현실답게
만드는 마법을 실현함으로써, 현상의 뒤에 있다고 여겨진 이데아의
세계를 철저하게 해체하고 있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존재근거와
필연성을 정당화해야 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이데아다.
상황이 정반대로 역전된 것이다.
6. 만약 이데아와 이미지, 철학과 시가 여전히 불화의 관계에
있다면, 플라톤의 이데아가 스스로를 정당화 하기 위하여
이미지를 필요로 하였던 것처럼, 현대의 이미지는 거꾸로 삶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하여 이데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디지털 정보사회에서 요구되는
이데아는 이미지를 배척하는 이데아는 결코 아닐 것이다.
7. 현대의 이미지가 어느 지점에서 삶의 의미를 해명하고
또 어느 지점에서 현대인의 삶을 왜곡하고 소외시키는 지를
정확하게 판단하려면, 우선 이데아와 이미지의 불화 관계에서
나타나는 이미지의 이중성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8. 이데아와 이미지의 불화관계에 관한 물음은 미메시스(mimesis),
즉 모방의 문제로 연결된다. 플라톤은 예술가를 이상 국가에서
추방하는 근거로 미메시스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9. 플라톤의 미메시스 이론은 근본적으로 이미지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형상은 우리가 그때그대 만나는 다수 및 다원성과
관련하여 동일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어떤 하나의 모습을 일컫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 생산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신이
어떤 형상이 떠오르도록 원형적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이 자연이 있는 그대로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바로 형상이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의 형상(eidos)이, 
개념이 아니라 무엇인가의 모습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형상은 어떤 사물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진리의
이미지인 것이다. 
10. 그러나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만나는 것은 우리에게
‘보이는 것들(phainomena)'이다. 자연의 사물들을 우리의 감각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출처: 이진우, (테크노 인문학), 책세상, pp.119-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