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제품 박스를 열면 사용설명서가 들어 있다. 해당 제품의 작동법이 친절하게 설명돼 있다. 그러나 때론 무시무시한(?) 협박도 볼수 있다.
‘기업이 제시한 용도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다가 고장이 났을 경우에는 절대 교환이나 환불을 해줄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래서일까? 소비자들은 대부분 제품을 보수적으로 사용한다. 예컨대 세탁기는 빨래할 때만 쓰고, 냉장고는 음식을 보관하는 용도로만 쓴다.
하나의 제품에 다양한 기능이 탑재된 만능 제품보다 하나의 기능에 특화한 전문 제품을 선호하는 이유도 이런 인식이 굳어진 영향이 크다. 그런데 최근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소비자들이 기업의 원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용도로 제품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숙취 해소를 위해 헛개나무 열매로 음료수를 출시하자 되레 술과 섞어 폭탄주를 만들어 마신다. 과일의 원액을 만들려고 사용하던 착즙기를 버려지는 과일 찌꺼기를 얻어 감자전이나 미용팩, 심지어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용도로 쓴다. 깨지기 쉬운 제품을 포장하기 위해 사용하던 완충재(일명 뽁뽁이)는 겨울철 에너지 절약의 일등공신으로 거듭나고 있다. 창문 유리면에 붙여 고급 단열재 효과를 얻는다.
캠핑장에서나 꺼내던 텐트를 안방에 설치해 난방비를 줄이고 겨울밤을 따뜻하게 보내는 집도 있다. 이처럼 제품을 본래 용도로만 사용하지 않고 소비자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덧대 새로운 목적으로 사용하는 현상을 ‘리퍼포징(repurposing)’이라 일컫는다. 용도를 새롭게 정의한다는 의미다. 소비자는 한층 유연한 사고로 자신이 가진 제품을 다각도로 바라본다.
제품의 사용 상황을 다양하게 적용해보는 편집 욕구도 발휘한다. 이때 예상치 못한 발견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스스로 발견한 의외의 조합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기 때문에 작은 발견이 유행으로 확산되기도 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표정관리가 쉽지 않아졌다. 자신이 제시한 목적과 다른 용도로 제품을 활용하는 것에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새로운 수요가 발생해 전혀 뜻밖의 매출이 발생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또 소비자가 제품을 지속적으로 활용해 실사용률이 증가한다.
집 구석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천덕꾸러기 취급 당하는 일이 줄어드는 것이다. 제품 이미지가 제고될 수 있다. 그러나 소비자가 제품을 다른 용도로 쓰면 기업이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때 소비자에게 어떻게 보상 해줘야 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생긴다.
기업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비자들은 제품을 있는 그대로만 쓰던 소극적인 모습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용도를 정의하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이 시점에 기업에게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리퍼포징 트렌드 시대에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가령 제품과 서비스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소비자들의 기발한 상상력을 적용할 여지를 남겨둬야 한다.
나아가 기업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 아이디어를 공유할 플랫폼을 제공한다면 금상첨화다. 소비자들의 상상력을 조금만 빌려도 한 제품의 변화뿐만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의 신규 사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