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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이 참 많이 들어갔다’는 느낌이 드는 책이 있다. 정명섭의 <조선직업목록>이 바로 그런 책이다. 조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밥벌이를 했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대표적인 직업 7개, 2부는 스스로 벌어먹고 사는 대표적인 직업 7개, 그리고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해서 먹고 사는 대표적인 직업 7개를 소개하고 있다.
조선조에는 타인이 울어야 할 장소에서 대신해서 울어주는 ‘곡비(哭婢)’라는 직업이 있었다. 왕실 장례식뿐만 아니라 왕릉을 옮길 때도 곡비를 썼다. 슬픔을 먹고 사는 이 직업에 대한 기록이 세종실록 등에 내려온다. 주로 어디에도 의지할 데가 없는 과부들의 직업이었다.
이규태 선생이 남긴 글에 따르면 1903년 인천을 떠나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로 가던 이민선 안에 젊은 곡비가 한 명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짐짝 안에 숨어서 밀항했기 때문에 일명 궤짝네라고 불렸다. 멕시코에서도 달리 할 일이 없어 조선인의 장례식장에서 울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타인을 대신해서 매로 먹고 사는 ‘매품팔이(代杖)’라는 직업도 눈에 들어온다. 부패가 하늘을 찌르던 시기 집안 관아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막대한 뇌물을 바치고 수령이 된 사람은 본전을 뽑기 위해 부유한 백성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우고 재물을 갈취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형조나 병영은 만만 한 양반감을 먹잇감으로 삼았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피해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뇌물을 바쳐 해결하는 방법을 찾거나 아니면 대신 매를 맞을 매품팔이를 구해야 했다. 흥부가에도 가진 것은 없고 먹여 살려야 하는 자식이 많았던 흥부가 매품팔이로 나선다.
‘조방(助幇)꾼’이란 직업도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에 조방꾼은 기생의 남편이라는 뜻으로 ‘기부’라 부르기도 했다. 기방의 문이 열리면 기생들의 뒤를 봐주고 술꾼들 때문에 발생하는 잡다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어느 정도는 끈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전별감이나 포도청의 군관, 의금부의 나장, 승정원의 사령, 군영의 장교들이 주로 조방꾼 역할을 했다.
사극에서는 기방의 주인 역할을 하는 기생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기생은 애초에 국가 소유의 공노비였다. 관기라고 불린 기생들은 지방 관아에 속해 있으면서 대를 이어가며 의무를 지었다. 조선조는 신분 세습 면에서 아주 엄격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남성 우위의 체제였기 때문에 후일 우리 문화 속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 들어 한양으로 올라온 기생들이 관아의 일이 끝나면 기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기생집단이 생겨났다.
이런 면에서 1894년 갑오경장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때 신분제도가 철폐되는데 유독 기생만 그 대상에서 제외됐다. 관기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해는 1908년이다. 이후 한성기생조합이 만들어지고 1948년 공식적으로 폐지돼 조방꾼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과거 시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직업이 ‘거벽(巨擘)’과 ‘사수(寫手)’ 그리고 ‘선접(先接)꾼’이다. 과거 때마다 최소 1만명에서 10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몰렸다. 조선 왕조가 존속하는 500년 동안 800여회의 과거에서 합격자는 1만5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자연히 좁은 문을 뚫기 위한 기발한 방법들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조가 신분사회라고 하지만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그것은 양반 혹은 사대부 집안이라고 해도 그리고 아무리 돈이 많은 집안이라 해도 5대가 지나도록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하면 가문의 격이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변변한 산업이 없었던 시대인 까닭에 가문을 지탱할 만한 경제적 수단 역시 관료 만한 것이 없었다. 돈을 주고 양반을 살 수도 있었지만 진짜 배기 양반은 과거에 합격해야 했다.
그런데 수만명이 몰린 공터에서 과거 시험 문제를 모든 사람이 동시에 푸는 일은 불가능하다. 자리 싸움이 얼마나 치열할 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앞자리를 잡기 위해 전문가들이 동원됐다. 이들은 한양을 주름잡던 건장한 체구의 무뢰배들이었다. 이들이 바로 선접꾼들이다.
거벽은 과거 시험에 나설 정도의 학식과 문장을 갖춘 자로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대리시험을 치는 사람을 말한다. 사수는 거벽보다 문장 구사 능력은 떨어지지만 문구를 이해하고 받아 적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글 솜씨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저자는 조선 후기 당쟁의 원인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제한된 관직 때문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과거에 합격한다고 해도 우리가 아는 정승이나 판서, 참판 같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