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연준 피셔 부의장. |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통해 물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흔히 ‘매파’라고 부른다. 반대로 완화적인 통화정책으로 고용을 촉진해야 한다는 주장은 ‘비둘기파’로 간주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통화정책은 명백히 비둘기파가 주도했다. 위기 이후 첫 금리인상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미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는 앞으로 어떠한 성향의 경로를 밟아 나갈까.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경로의 일단을 최근 미 연준의 스탠리 피셔 부의장이 보여줬다. 피셔 부의장은 과거의 여느 부의장과는 완전히 격이 다른 거물이다. 연준의 주상(主上)이 재닛 옐런 의장이라면, 피셔 부의장은 ‘대원군’으로 비유할 만하다. 그는 과거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 시절 벤 버냉키 전 의장의 박사과정을 지도했다. 그래서 그는 ‘버냉키의 멘토’라고 불렸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도 그의 제자다. 버냉키의 후임으로 유력시됐던 래리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 역시 피셔 부의장으로부터 경제학을 배웠다.
금리 조금만 올리고 말 듯
취임 후 대외 발언을 자제한 피셔 부의장은 지난 8월 11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공개연설을 했다. 금융위기 이후 지속되고 있는 저성장과 반복되는 성장 전망 하향을 지목하면서 “중앙은행들이 직면한 첫 번째 과제인 성장 회복을 지원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분히 비둘기파적인 발언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이러한 저성장은 보다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경제 체질의 변화, 즉 공급능력의 성장 속도가 저하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공급능력’이란 그 나라 경제가 생산해 낼 수 있는 부가가치의 총량을 뜻한다. 잠재 국내총생산(GDP)이라고도 부른다.
‘공급능력이 생각보다 낮아져 있다’는 논리는 연준 매파 인사들의 전유물이었다. 경기부양을 강화, 장기화할 경우에는 수요가 공급능력을 쉽게 초과하게 되고, 그러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피셔 부의장의 발언은 보다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매파적인 논리는 또한 역설적으로 완화적인 금리 정상화 경로를 가리키기도 한다. 금리를 조금만 올리고 말 것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금리인상 행보의 최종 지점이 될 ‘중립적 정책금리’ 수준은 잠재성장률 수준에 의해서 결정된다. 피셔 부의장의 말대로 미국의 잠재성장률이 과거보다 저하된 상태라면, 중립적인 정책금리 수준 역시 과거의 정상에 비해 낮아지는 것이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인 핌코가 상정한 미국의 새로운 중립적 정책금리 수준은 과거의 절반 수준인 2% 정도였다.
피셔 부의장은 미국 고용시장 진단에서도 이중적이었다.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 같은 인구구조적인 요인으로 인한 공급능력의 감소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하는 동시에 실망 실업자들이 대규모로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미국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놀랄 만한 수준의 하락세를 보인 배경에 이 두 가지 요소들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피셔 부의장의 ‘저성장론’은 그의 제자인 래리 서머스 전 장관의 ‘영구적 침체론(secular stagnation)’을 연상케 하지만 둘의 ‘저성장론’은 본질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 서머스가 우려한 저성장은 공급능력의 저하 때문이 아닌 주로 수요의 구조적인 부족 탓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머스 전 장관의 해법은 주로 ‘대규모의 재정지출 확대와 저금리’와 같은 수요 촉진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이와 달리 피셔 부의장의 저성장론은 ‘제한적인 저금리 정책’을 가리키고 있다. 공급능력의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저하는 통화정책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피셔 부의장의 진단과 해법은 옐런 의장과도 차이가 있다. 옐런 의장은 수요 부족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있다. 경제활동참가율이 낮아지고 그래서 노동공급 증가 속도가 저하돼 있지만, 이는 주로 구조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저성장으로 인해 일자리가 부족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적극적인 부양정책으로 일자리를 늘리면 실망해서 퇴장했던 노동력들이 고용시장에 다시 공급될 것이라 믿고 있다.
지난 7월 미국 고용지표는 일단 옐런 의장의 손을 들어줬다. 미국의 취업자 수는 7월에도 20만9000명이나 증가했다. 일자리 수가 20만명 이상의 빠른 속도로 이렇게 장기간 늘어나는 현상은 1997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실업률은 6.2%로 오히려 0.1%포인트 높아졌다. 옐런 의장의 말대로 구직을 포기했던 노동력들이 대거 고용시장에 복귀한 결과였다. 공급능력이 확대됐다는 의미다. 그래서 미국의 통화정책 결정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는 옐런 의장의 지론을 공식 수용했다.
하지만 이런 ‘사용되지 않고 있는 상당한 규모의 노동자원’ 중 일정 부분은 구조적인 실업자들일 것이다. 그들의 노동기술은 기업들이 요구하는 수준에 못 미치기 때문에 통화부양 정책으로 경기를 띄워도 구제할 수가 없다. 문제는 이 상당한 규모의 유휴 노동자원 중에서 구조적인 실업자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옐런 의장의 주도로 미국 연준이 도입한 ‘측정법’은 임금이다. 임금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하면 경기 순환적 요인으로 인한 유휴 노동력이 거의 소진돼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옐런 의장으로 대표되는 연준의 비둘기파 진영은 장기간 저금리로 완전고용을 달성한 뒤에는 빠른 속도로 긴축에 나서 인플레이션 억제에 돌입한다는 시나리오를 갖고 있다. 이와 달리 연준 매파 진영의 논리들은 조기에 금리를 인상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한 뒤 과거보다는 낮은 수준에서 금리인상을 중단한다는 시나리오를 내포하고 있다. 미국 경제의 가용 노동력과 공급능력이 생각보다 작아 인플레이션이 빨리 발생할 수 있으며, 대신 잠재성장률이 대폭 낮아졌기 때문에 과거처럼 높은 금리수준은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미 경제 현실 좀 더 정확히 인식이 두 진영의 논리를 동시에 수용하고 있는 피셔 부의장의 이번 연설은 두 진영 중간쯤의 금리인상 시나리오를 가리킨다고 볼 만하다. 이른바 ‘하이브리드’ 금리인상 경로는 미국 경제 잠재공급능력에 대한 과도한 낙관(비둘기파)과 과도한 비관(매파)을 적절하게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을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을 수 있다. 실행가능성 또한 보다 현실적이다. 그러나 이런 금리인상 경로는 과거 경기 회복기의 긴축 사이클에 비해서는 훨씬 완화적이다.
경기순환적인 저성장과 구조적인 저성장을 동시에 반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완화적 금리 정상화 경로가 자산시장의 거품을 양성한다는 데 있다. 영구적 침체론을 제기했던 서머스 전 장관은 ‘완전고용과 금융안정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중립적인 금리는 존재하지 않을 지 모른다’고 우려한 바 있다. 낮아진 성장수준을 반영해 저금리 정책을 쓰면 거품이 발생하고, 거품을 막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동원하면 실물경제가 감당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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