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자 대접 받는 것도 행운”
‘얼굴 없는’ 사람들의 애환 취직 못한 것도 서러운데 통계에도 못 껴 … 청년 실업률 7% 누가 믿겠나 |
다들 고향을 찾는 명절이 괴로운 이들이 있다. 대학을 나왔지만 일자리를 못 구한 사람들이다. 벌써 몇 년째 내리 공무원 수험서를 파고 있는데, 올해부턴 모집 인원이 줄어들 거라는 불길한 소식이 들려온다. 이력서를 수십 장 들고 다니다가 요즘은 지쳐서 입사지원서 내는 것도 포기한 젊은이도 있다. 더구나 이와 같은 경우 기가 막힌 일은 구직 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업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에선 실업자 대우를 받는 것도 행운”이라고 뼈 있는 농담을 던질 만도 하다. 또 취업자로 잡힌다고 해서 어디 다 같은 취업자인가? 하루에 몇 개씩 알바를 뛰거나 일주일에 고작 몇 시간 일하고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의 취업자가 100만 명에 육박한다. 이들 유사 실업자의 고달픈 하루 일과와 애환을 담았다. #1 대졸 취업 준비생 29세 K씨
K씨는 지난해 2월 수도권 소재 H대를 졸업했다. 전공은 반도체공학. 대학에 들어갈 때만 해도 반도체 회사 연구원이 되고 싶었다. 대학 4학년 때 라디오 PD로 진로를 바꿨다. 1년에 평균 10명을 뽑는 라디오 PD가 되기 위해 지금은 토익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아직 부족한 게 많다는 생각에 졸업한 뒤 한 번도 입사지원서를 낸 적이 없다. 서른이 되기 전에 어떻게든 직장을 잡아야 한다는 부담과 불확실한 미래가 그를 불안하게 만든다. “괜한 욕심을 부린 것 같아 가끔 후회도 합니다. 4학년 2학기 때부터 꾸준히 반도체 회사를 찾았으면 지금은 어딘가 다니고 있지 않을까요?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시는 부모님의 시선에 죄인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졸업 직전 K씨는 부모님에게 “라디오 PD가 되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왜 공대 졸업했어? 일단 반도체 회사 다니면서 준비해. 회사 다니다 보면 그 일도 재미있을 거야”라며 반대하던 부모님이지만, 이제는 “힘내라”며 응원한다. 가끔 “힘들지? 그래도 꿈이 있으니 자랑스럽다”는 아버지와 갖는 술자리에서 K씨는 힘을 얻는다. K씨가 힘을 얻는 또 다른 원동력이 있다. 함께 도서관 자리를 채우며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족’들이다. 서로 “훗날 성공하자”며 격려한다. “친한 친구의 말보다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의 응원이 더 큰 힘이 된다”는 게 K씨의 말이다. K씨 주변에는 3년 가까이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이들도 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공무원 선발 인원을 줄이겠다’고 발표하자 도서관은 마치 초상집 같았습니다. 몇몇 공시족은 내내 줄담배만 피워댔고, 몇몇은 울먹이기까지 했으니까요.” “단지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공무원을 택한 사람들에게도 잘못이 있지 않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물론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공무원시험에 목을 매는 이유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되물었다. “청년실업률이 7%라는데 그걸 누가 믿나요? 서울 시내 공립도서관과 대학도서관에서 취업 공부하는 이들만 세어 봐도 10%를 훌쩍 넘을 겁니다. 구직자들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통계가 나와야 정부 대책도 바로 서는 것 아닌가요.” #2 고졸로 구직 단념한 26세 B씨
B씨는 ‘니트족(구직 단념자)’이다. 그가 취업을 포기한 이유는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인정해 주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 지쳐서다. 그는 2001년 S정보산업고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를 나온 뒤 2년 동안 한 중소기업에 다녔다. 대학에 가라는 주변의 권유도 있었지만 내 손으로 돈을 번다는 생각에 대학 진학의 꿈을 접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B씨가 다니던 회사는 부도가 났고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직 젊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라는 생각에 근무 경력을 바탕으로 다른 회사를 알아봤다. 하지만 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게 결정적인 하자로 작용했다. “중소기업들이 사람을 못 구해 힘들어 한다지만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을 안 뽑으니까요. 관련 업종에 2년 넘게 근무했으면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웬만한 일은 다 할 수 있거든요.” 잠깐 몸담은 직장도 있었지만, 대졸자가 입사하면 B씨의 할 일은 점점 줄었다. 어쩔 수 없이 사표를 써야 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이다. “대학을 안 다닌 몇몇 친구도 나 같은 피해를 보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대학에 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동안 번 돈은 생활비로 거의 다 썼고, 없는 집안 형편에 등록금은 사치였다.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한다는 게 두려워졌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2007년 초 B씨는 ‘다시는 구직활동을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어차피 안 될 게 뻔해서다. 하루하루 세월을 보냈다. 요금이 연체되자 휴대전화가 끊겼고, 자연히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졌다. 그런 아들이 못마땅한 어머니는 “무엇을 하든 밖에 나가라. 일을 안 하면 밥도 없다”고 내몰았다. 어머니의 성화에 집을 나섰지만 갈 데가 없었다. 동네 주변을 맴돌다 자주 끼니를 걸렀다. 그러던 지난해 10월 어느 날 ‘교회에서 주관하는 봉사활동을 하면 밥을 준다’는 말을 들었다. 그 봉사활동에 참가했다. 단지 점심을 먹기 위해서였다. 일이 쉽진 않았지만 점심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봉사활동이 일찍 시작되는 날에는 아침식사로 빵과 우유를 주기도 했다. “솔직히 종교에 대한 믿음은 없습니다. 단지 점심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좋은 거죠. 앞으로도 일자리를 구할 생각은 없어요. 계속 이 봉사활동을 할 겁니다. 혹시 모르죠. 하다 보면 믿음도 생기고, 봉사활동이 좋아져 이 길로 갈 수 있을지도….” B씨와 같은 구직 포기자는 실업자로 분류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청년실업자가 100명 중 7~8명이라는 것은 알지요?”라고 기자가 묻자 그는 “말도 안 된다”고 일축했다. “친구들을 보면 절반가량이 일자리를 못 구했는데 청년실업률이 7~8%밖에 안 되겠어요? 정부가 고교 졸업자의 취업전쟁을 안다면 말로만 쉽게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하지 못할 겁니다.” 봉사활동이 없는 날이면 B씨는 시립도서관을 찾는다. 이 또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시립도서관 구내식당은 3000원 이내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 오늘도 B씨는 아침과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 문을 두드린다. #3 31세 전문대 졸업 H씨의 알바 인생
H(31)씨는 2007년 6월부터 A택시 스페어 요원으로 일하고 있다. 계약 당시 ‘조만간’ 정식 기사로 전환해 준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아홉 달이 지나도록 스페어 요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H씨는 전문대를 졸업한 뒤 자동차 정비회사 기능공으로 근무했다. 전공이 자동차 정비라서 기술이 있고 적성에도 맞고 수입도 괜찮았다. 하지만 5년을 넘기지 못했다. 작업하다가 왼쪽 팔목을 다쳤기 때문이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팔목을 움직이는 게 부자연스러웠다. 결국 약간의 퇴직금을 받고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당시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어서 잠시도 놀 수 없었다”는 H씨는 새로운 일거리를 찾으면서 3개의 아르바이트를 뛰었다. 이때 한 달 수입은 130만원 안팎. 좀 더 나은 수입을 올리기 위해 택시를 몰기로 했다. “아르바이트를 세 군데 뛰는 각오로 택시기사를 하면 150만원 이상 벌 수 있다”고 친구가 권했다. 기사 모집 광고를 본 H씨는 A택시회사를 찾아갔다. 그를 처음 본 사장은 “지금은 기사 자리가 없으니, 조금만 일하면 정식 기사로 전환시켜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다친 팔목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성실히 안전하게 운전하면 정식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정식 기사는 기본급 75만원가량을 받는 대신 매일 10만원을 입금해야 했다. 매일 6만5000원만 입금하면 되는 스페어 요원은 기본급이 없었다. 입금액을 초과한 금액이 H씨의 수입이다. 현행 법규상 스페어 요원은 불법인 데다 택시회사가 부를 때만 운전할 수 있기 때문에 큰돈을 벌 수 없다. H씨의 첫 달 수입은 약 100만원. 아르바이트를 할 때보다 30만원이 적었다. 그렇다고 당장 그만둘 수도 없었다. 조만간 정식 기사가 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남는 시간에 다른 아르바이트를 했다. 마침 친구가 패스트푸드점 매니저로 있어 운전이 없는 날에는 친구 일을 돕는다. 한밤중 연락이 오면 술 취한 운전자의 대리기사로도 뛰고. 어쩔 수 없이 정식 취업을 하기 전에 ‘프리터족’이 된 셈이다. 그의 두 번째 달 수입은 150만원. 수입은 조금 늘었지만 몸과 마음은 서서히 지쳐갔다. 그렇게 두세 달을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친구한테서 헤어지자는 전갈이 왔다.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일을 못하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여자친구와의 이별보다 뾰족한 대책이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서글펐다. #4 졸지에 가장이 된 36세 주부 J씨
2007년 초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졸지에 여성 가장이 된 J(36)씨의 한숨이다.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 슬픔보다 걱정이 앞섰다. 올해 일곱 살과 네 살인 두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일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트럭 운전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던 터라 모아둔 돈도 없었다. 더구나 첫아들을 낳은 뒤 집안 살림만 한 J씨로선 하늘이 노랬다. 당장은 남편의 사망 보험금과 모자가정 지원금(어머니가 가장인 집을 대상으로 유치원비를 50~100% 지원해 주는 제도. 아동 1인당 추가로 양육비 5만원을 지원한다. 기본 조건으로 2007년 기준 월 수입 126만4000원을 넘지 않으면 신청할 수 있다)으로 살림을 꾸릴 수 있지만 커 가는 아이들의 양육비가 문제였다. 일자리를 찾기로 결심한 J씨는 여성인력개발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두 차례에 걸쳐 직업교육을 받았다. ‘나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감도 생겼다. 하지만 실제로 직장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일자리가 있어도 어린 아이들이 문제였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끝나면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기 때문이다. “평소 여자가 취업하기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닥치고 보니 이 정도일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나 같은 기혼 여성은 갈 곳이 없더라고요. 동네 아주머니들이 힘든 파출부나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결국 그는 지난해 말 일자리 구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아이들이 제 앞가림을 할 때까지 집에서 부업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요즘 인형에 눈을 붙이는 일과 마늘 까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월 25만원가량을 벌고 있다. J씨와 같은 경우는 대표적인 ‘실망 실업자군’에 속한다. 하지만 고용 통계에선 현재 구직활동을 하지 않고 있는 데다 주부라서 실업자도, 취업자도 아닌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된다. “오늘은 보험금과 부업을 해 번 돈으로 입에 풀칠은 한다지만, 내일은 어쩌죠? 애들은 점점 커 가는데…. 정부에서 청년실업만 걱정하는 것 같아요. 당장 더 급한 사람은 저 같은 여성 가장 실업자인데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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