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어 죽어도 아들에게 안 물려줘”
중국 신발왕국의 몰락 위기 한 해 6억 켤레 넘게 생산하는 천다이진 … 인력난·인건비 상승으로 위기 |
중국 푸젠성 진장시 천다이진. 오래된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신발 부자재 상점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다른 한쪽은 3~4층 높이의 제화 공장이 밀집되어 있다. 이곳이 바로 중국 최대의 신발제조 집산지인 이른바 ‘신발도시(鞋都)’라 불리는 곳이다. 천다이진은 38.8㎢에 3000여 개의 신발 관련 업체가 자리잡고 있다. 지난해 6억5000만 켤레의 신발을 생산했으며 Anta, 361° 등 다양한 자체 브랜드 제품을 판매 중이다. 천다이진 신발산업의 태동은 지난 7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3월 린투추가 홍콩·필리핀 친구 14명과 한 사람당 2000위안을 출자해 설립한 양다이 회사가 모태다. 한때 유동인구 30만까지 늘어 그 당시는 공급물량이 부족해 신발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소문을 들은 이웃 사람들이 하나 둘씩 신발생산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나이키도 중국 최초로 이곳에 하청공장을 차렸다. 그러나 모방업체가 출현하면서 나이키는 결국 공장을 포기하고 떠났다. 하지만 남겨진 생산설비와 기술, 노동자들은 그 후 운동화 생산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취스(趨時) 신발회사 딩싱허(丁星河) 사장의 창업 역시 이때였다. 19세가 되던 1981년, 가난한 농사꾼이었던 그는 마을 한구석에 신발공장을 차리고 슬리퍼를 생산했다. 장사가 잘되자 많은 사람이 너도나도 슬리퍼 생산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는 봄에는 슬리퍼, 가을에는 운동화를 만들어 차별화했다. 가구당 연간 수입이 1만 위안에도 못 미치던 시기 그는 10만 위안을 벌었다. 딩 사장이 창업하던 시기 천다이진에는 이미 500여 개의 동종 기업이 있었다. “그 당시 신발 만들던 사람 중 친척이나 친구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나보다 훨씬 큰 기업이 되었다”고 딩 사장은 말했다. 그가 말한 중국 제화업계에서 유명한 딩즈중(丁志忠) Anta 사장을 비롯해 딩수이보(丁水波) XTEP 사장, 딩궈쓰(丁國斯) 레이수 사장 등은 모두 딩(丁)씨 일가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는 천다이진의 대대적인 확장기였다. 공업화 물결이 불면서 기존의 가내수공업 방식을 대체했다. 오래된 집은 잇따라 3~4층의 공장 건물로 개조되었으며, 수백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량생산방식으로 변신했다. 일손이 달리자 갈수록 많은 사람이 내륙지역에서 이곳으로 몰려왔다. 신발공장 사장이 그랬듯 자신도 고향 친척과 친구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작은 시골 마을은 점점 신발공장 집산지로 변해 갔다. 국제적인 명성도 쌓였다. 소문을 듣고 많은 외국 바이어가 몰려와 앞 다퉈 신발을 주문하는 한편 메이저 업체들은 하청공장을 찾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폭증하는 바이어의 주문서는 이곳을 급속도로 발전시켰다. 1984년 천다이진의 공업생산액은 처음으로 1억 위안을 돌파했고, 2003년에는 100억 위안을 넘어섰다. 지난해에는 185억6000만 위안에 이르러 20여 년 만에 185배 증가했다. 당시 아무도 모르던 이곳은 성장을 거듭해 이제는 푸젠성 가운데 가장 부유한 마을이 되었다. 천다이진에는 전 세계에서 몰려온 벽안의 바이어는 물론이고 푸젠, 쓰촨, 안후이, 장시 등지에서 끊임없이 유입되는 일용 근로자들로 하루 종일 북적댄다. 구매력이 늘어나자 BMW, 벤츠 자동차 영업사원들까지 몰려왔다. 이곳의 상주인구는 7만 명에 불과하지만 하루 유동인구는 30만 명이 넘는다. 90년대 들어 우수기술 보유 기업들은 자체 브랜드 확보가 얼마나 많은 이윤을 가져다주는지 주목하기 시작했다. 가격경쟁 차원을 넘어 자기만의 브랜드 꿈을 가지게 된 것이다. 브랜드 분야에서 Anta는 선두주자다. 1999년 160만 위안을 투입해 탁구 스타인 쿵링후이를 광고 모델로 발탁하면서 ‘나의 선택, 나의 기쁨’이라는 광고카피로 Anta를 유명 브랜드 반열에 올려 놓았다. 이에 힘입어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연속 4년간 Anta는 운동화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현재 천다이진 소재 기업은 6개의 유명 브랜드와 30개의 자체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대대적인 브랜드 광고는 천다이진이 기존의 단순 제조공장 이미지를 벗고 패션 이미지 도시로 부각하는 계기가 됐다. 2007년 7월 10일 Anta는 홍콩거래소에 상장됐다. Anta의 성공적인 상장에 힘입어 361°, XTEP 등의 기업공개(IPO) 작업도 진행 중이다. 딩펑펑은 중국기업가와의 인터뷰에서 “2010년 이전에 증시 상장을 희망한다. 상장은 자금조달뿐만 아니라 선진 경영기법 도입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거침없이 잘나가던 천다이진도 최근 들어 어려움에 처해 있다. 우후죽순처럼 신발업체가 난립하고, 면적 확대에 한계가 있어 공장 건설을 위한 토지 확보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 때문에 일부 브랜드 기업은 공장을 인근 지방으로 이전하고 있다. 고리대출로 겨우 자금조달 “현재 천다이진은 탁아소와 마찬가지다. 기업 규모가 어느 정도 커지면 곧바로 떠나 버린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들을 붙잡아 둘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다. 반면 다른 지역은 세수를 비롯해 토지구입 등 여러 방면에 특혜가 있다”고 딩쓰융(丁思勇) 서기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환경오염 문제 역시 심각하다. 이미 현지 상수도는 심각한 오염 상태로, 음용수로 부적합한 실정이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도 오염된 지 오래다. 천다이진 정부가 오염 정화작업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악취가 진동한다. “수년 전만 하더라도 강물 이용에 문제가 없었으나, 지금 수질로는 공업용수로도 사용하기 어렵다”고 현지 주민은 비판했다. 비즈니스 환경 역시 악화일로다. 중국 운동화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로 인해 대기업의 생산물량 증가는 곧바로 취약한 중소기업의 고사로 이어진다. 한창때와 비교할 때 현재 신발기업 수는 절반 가까이 줄어든 상황이다.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인력난과 인건비 상승도 심각해지고 있다. 노동자 인건비는 2000년 연간 1만 위안 수준에서 현재는 2만 위안으로 배나 올랐다. 게다가 위안화 평가 절상에 따라 국제시장에서 가격경쟁력도 크게 떨어졌다. 딩싱허 사장 역시 “이윤은 갈수록 감소하고, 바이어 주문 역시 과거보다 줄어들었다. 연간 매출액이 5억~6억 위안 정도이나 각종 비용을 제하고 나면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중소기업이 대부분이라서 자금조달도 여의치 않다. 사정이 어렵다 보니 기업 간 연대채무를 통한 자금조달이 난무하고, 차입금을 오랫동안 갚지 않는 경우도 많다. “내가 아직 사기 당하지 않고 영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 행운이다. 일단 사기 당하면 심각한 타격을 미친다. 이는 곧 기업의 존립까지 영향을 준다”고 딩 사장은 말했다. 수년간 많은 기업이 줄도산한 이유도 대출금이 너무 많고, 회수 불가능한 악성 채권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자금 압박이 심화되면서 고리대금업자를 통한 융자도 횡행하고 있다. 매출 부진과 고액 이자 때문에 일부 기업주는 가족을 데리고 야반도주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신발업계의 고사를 막기 위해 2007년 11월 말 천다이진 정부와 상회는 처음으로 신규 바이어 발굴을 위한 러시아 시장개척단을 파견했다. 올해 대학을 졸업한 딩 사장의 아들은 가업을 계승하지 않고, 홍콩 회사에 취업했다. 딩 사장은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에게 신발사업을 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
위안인(袁茵) 기자번역=홍창표 KOTRA 해외투자팀 차장 | [927호] 2008.03.03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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