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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고집’ 금리 놓고 여러 판 붙어

도일 남건욱 2008. 6. 15. 18:59
‘두 고집’ 금리 놓고 여러 판 붙어
강만수와 이성태의 공방전
정부는 대놓고 ‘내려라’ 압박 … 한은은 ‘간섭 말라’며 마이웨이

‘100일의 전면전’. 금리를 놓고 벌인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의 충돌을 두고 시장에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강 장관 취임 순간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대치는 100일 동안 이어져 왔다.

협조해도 모자랄 이 둘이 계속 충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목표성장률(6%) 달성이 시급한 재정부는 한은에 금리 인하를 압박하고, 한은은 물가 안정을 위해 금리 동결이 필요하다고 맞섰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국가 거시경제 정책을 책임지는 두 기관의 정책 방향(성장과 안정)이 완전히 다른 데서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의 금리 관련 충돌은 강 장관 취임 순간부터 시작됐다. 강 장관은 취임 직후, “최근 물가오름세는 국제유가 상승 등 외부 요인에 기인한 것으로 중앙은행의 유동성 관리 차원을 넘어섰다”고 말해 금리 인하 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중앙은행이 통제를 못하니 정부가 나서겠다는 뜻이다.

곧바로 한은이 대응했다. 지난 3월 7일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금리를 연 5%로 동결한 직후 내놓은 보고서에서 “금리 인하가 경상수지 적자 개선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폐쇄경제에서나 타당한 것이고, 오히려 금리를 올려야 경상수지가 개선된다”고 반박했다. 금리 때문에 물가가 오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날 이성태 총재도 기자간담회를 열어 “우리나라와 미국은 금융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미국을 따라 금리를 내릴 필요가 없다”고 반박했다. 금통위가 말한 ‘폐쇄경제’는 새 정부 경제팀을 이끄는 관료파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됐다. 쉽게 말하면 시장은 열려있는데 과거 폐쇄경제에 익숙한 사람들이 금리를 제어하려고 했다는 뜻이다.

재정부, 한은 통화정책에 불만

같은 달 10일, 재정부는 대통령 업무보고 자리에서 “통화정책은 전반적인 경제상황, 국내외 금리차 등을 감안해 한은이 신축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며 금리 인하 의지를 다시 한번 나타냈다. 내외 금리차가 벌어지면 해외로부터 자본 유입이 많아져 환율이 하락하기 때문에 한은이 금리를 인하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튿날(12일), 한은은 ‘내외 금리차와 환율 간 관계분석’ 보고서를 통해 “(미국의 정책금리는 계속 인하되고, 우리나라의 금리는 동결돼) 내외 금리차가 확대되면 환율이 하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으나 실증 분석 결과 명확한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재정부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 같은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3월 25일 한 포럼에서 이 총재는 인플레의 주범으로 꼽히는 국제 원자재가 상승에 대해 “원유나 농산물 가격을 흔히들 공급 충격이라고 얘기하고, 공급 충격에서 오는 것은 정책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며 “하지만 이는 중국, 인도 등의 수요가 늘어난 요인이 있기 때문에 과거 공급파동처럼 급격히 가격이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이 총재가 포럼에 서기 직전, 강 장관이 “현재의 물가상승은 원가 요인이 강하기 때문에 총수요를 관리하는 통화정책으로는 억제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언급한 것을 간접적으로 반박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민간연구소 한 선임연구원은 “정부의 물가를 잡기 위한 미시정책에는 사실상 한계가 있으며, 통화정책 동원(금리 인상)이 필요함을 시사하는 대목”이라고 풀이했다.

이 총재의 소신 발언 이후, 강 장관은 강도를 높여 금리 인하를 직접적으로 거론했다. 그는 한 강연에서 “한국과 미국의 정책금리차가 2.75%포인트까지 벌어졌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의미인지는 다 알 것”이라며 “금리정책은 중앙은행 소관이지만 환율과 경상수지 적자 추이를 감안할 때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덧붙여 “뭐든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며 한국은행의 신중함을 강력히 비판했다.

여기에 최중경 재정부 차관까지 나서 “내외 금리 차이가 크면 외국 자금이 급격히 흘러 들어오고 낙차가 해소되는 시점에는 확 빠져나가기 때문에 시장이 불안해질 수 있다”며 “다른 나라들이 자국 금리와 미국 금리 간의 차이를 어떻게 운용하는지 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강 장관을 거들었다.

재정부와 한은의 충돌은 4월 말 3명의 금통위원이 교체되면서 더욱 심화됐지만, 금리는 한은의 뜻대로 아직까지 5.0%를 유지하고 있다. 5월 금통위 직후 이 총재는 “유가와 환율 상승으로 물가 불안이 커지고 있다”고 밝히며 정부의 금리 인하 주장에 못을 박았다.

재정부와 한은 간 금리 공방이 계속되는 사이 유가와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물가는 가파르게 올랐다. 실제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년 8개월 만에 4%대를 돌파했다. 5월에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4%대 중반을 기록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물가 상승엔 정부의 고환율 기조도 한몫하고 있다. 이처럼 물가가 치솟으면서 한은의 금리 인하 불가 주장은 힘을 얻고 있는 상태다. 앞으로도 물가 상승 압박이 지속될 것으로 보여 한은의 금리 인하 불가 방침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일단은 이 총재의 판정승으로 볼 수 있다. 또 시장에서는 이 총재가 계속 신념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 경제학과 교수는 “강 장관의 경제 정책은 구시대적”이라며 “이 총재가 외부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물가안정 의지를 꾸준히 내비쳤기 때문에(고유가, 고환율 등 외적인 요인에도 불구하고) 물가상승률을 4% 초반대로 막을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두 사람 ‘금리 대치’ 당분간 계속될 듯

더불어 정부의 지나친 개입으로 한은이 금리조정 시기를 놓쳤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S자산운용사 한 임원은 “강만수 장관이 한은의 독립적인 권한(통화정책)에 너무 지나치게 간섭했다”고 지적하며 “이 때문에 한은이 제 역할을 못하게 됐고, 상황에 맞는 금리정책도 펼칠 수 없었던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번에 이코노미스트가 경제전문가 50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강만수 장관의 시장 개입이 지나쳐 한은이 제 역할을 펼치지 못했다”는 점을 현 정부의 큰 실수로 꼽은 사람이 많았다.

시장 관계자들 중엔 정부의 강한 압박에도 소신을 지켜온 이 총재에게 지지의 뜻을 보내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이는 현 경기상황에서 금리 인하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김완중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유가와 환율이 급등하는 상황에서 금리까지 내리는 것은 힘들다”며 “금리 인하로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겠다는 것은 정부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정부는 금리 인하가 아닌 우리 경제의 기초 체력을 다질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을 내놔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부는 지난 5월 27일 20억 달러를 시장에 풀어 1050원대이던 환율을 1030원대로 끌어내렸다. 정부가 그동안 줄기차게 강조해왔던 고환율과 금리 인하 기조와는 다른 행동이다. 하지만 언제든 기회만 되면 금리를 인하하겠다는 의지를 꺾은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시장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고유가에 따른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한 일시적 대응이란 얘기다.

박태근 한화증권 거시경제실장은 “민간은 시장의 원칙만 서면 잘 돌아간다. 여기서 정부가 할 일은 간섭이 아닌, 원리에 맞게 운영될 수 있는 자리만 만들어 주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