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아줌마 시대’ 경제 권력을 잡다
가계와 의사결정권 주도 … 재테크·사회문제도 적극 참여 |
정가가 컴퓨터로 찍히는 백화점에서도 ‘깎아줘’를 밀어붙이던 그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쇼핑 정보를 얻는다. 더 이상 자식 인생에 목숨 걸지 않고, 남편 성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새로운 ‘아줌마 트렌드’를 만들고 있다. 가계의 경제권과 의사결정권을 넘어 시장과 여론의 주도권을 잡은 대한민국 뉴 파워 ‘아줌마’를 만나봤다. 지난 6월 1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 문화제 현장,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한켠에 마련된 연단 옆쪽에 작은 쪽지가 붙어 있다. ‘음식과 물과 음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이명박 정책에 반대하는 아줌마 부대’. 요즘 아줌마들은 이렇게 사회에 먼저 ‘소통’의 메시지를 날린다. 특히 최근 벌어지고 있는 촛불 문화제에서 아줌마 부대의 힘은 눈에 띈다. 여성·사회단체들이 모여 ‘장관 고시 철회와 재협상을 요구하는 엄마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미국산 쇠고기를 판매하겠다고 알린 대형 마트에서 1인 시위도 벌였다. 그중에서도 아이들 손에 피켓을 들려 유모차에 중무장시키고 거리로 나온 ‘유모차 부대’는 그 담대함과 자신감이 놀라움을 안겨줬다. 주은우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아줌마들의 집회 참여에 대해 “집회에서 중심이 되는 아줌마들은 주로 30~40대로 대학에서 사회 문제에 대한 의식을 길러 온 여성들”이라며 “그런 의식이 잠재해 있는 가운데 가족들의 먹거리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가족의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참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남성 우월주의적 시대의 여성과 다르게 대졸 이상의 고학력을 지닌 아줌마들은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이어 주 교수는 “핵가족 시대가 되면서 아줌마를 내 아이, 내 남편만 챙기는 가족 이기주의적 인간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였지만 아줌마들은 기회와 통로만 있으면 언제든지 자기 의견을 표출하고 사회적인 고민을 나누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아줌마들이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과거보다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휴대전화나 인터넷 같은 정보기술(IT)이 발달하면서 ‘아줌마 사회’에서도 나름의 스타와 전문가, 오피니언 리더가 탄생하게 됐다. 육아·인테리어·요리법 같은 다양한 정보를 공유할 장이 마련된 셈이다.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아줌마들은 원하는 정보를 마음껏 얻고, 그동안 관심이 덜했던 정치·경제·사회 다방면의 구석구석을 접했다. 아줌마는 가정의 CEO
또 온라인 커뮤니티가 활발해지면서 다른 아줌마의 능력이나 라이프 스타일을 공유하게 됐다. 인터넷에서 잘 알려진 일반인 주부들이 방송·신문·잡지 등 대중매체에까지 이름을 알린 경우도 많다. 아줌마들의 일상이 변함에 따라 세상이 아줌마들을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최근 1~2년 사이 아줌마들은 ‘살림살이’를 ‘비즈니스’로 바꿨다. 가족 구성원의 교육과 위치를 관리하고, 가계를 책임지고, 가정을 벗어난 대외활동에까지 힘이 미치고 있다. 이런 아줌마의 바뀐 활동 때문에 아줌마를 ‘가정의 최고경영자(CEO)’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거 가족 중 1순위가 시부모라면 요즘은 자녀가 삶의 1순위다. 전업주부도 남편을 집 안에서만 내조하지 않고 출세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힐러리형 외조’를 따르게 됐다. 남편이 중소기업 사장인 전업주부 김현지(42)씨는 “요즘 아줌마들은 만능 엔터테이너가 돼야 한다”며 “내가 어릴 때는 학교 다녀와서 엄마가 맞아주는 것이 좋았는데 요즘 아이들은 오히려 밖에 나가서 일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역시 전업주부인 정미조(40)씨는 “은행 프라이빗 뱅커인 남편을 ‘외조’ 하려고 골프모임까지 다닌다”고 밝혔다. 자기계발에도 열심이다. 강남에 사는 한 주부는 “성형·마사지·네일 아트 같은 것은 안 하는 사람이 없어 당연한 듯 챙긴다”며 “강남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아줌마들이 점점 ‘인생을 누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문화생활도 활발하다. 평일 낮에 친구들과 미술관에 들르고 저녁 시간에는 요가, 도예 등 문화센터 수업을 찾는단다. “꼭 필요할 때 말고는 집에 잘 있지 않는다”는 것이 아줌마들의 얘기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경제력이다. 2003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총생산 522조원 중 22%(약 115조원)를 아줌마가 창출했고, 국내 취업자 약 2200만 명 중 42%가 여성이고 이 중 80%가 기혼 여성이다. 가계 소비를 따져보면 90% 이상을 아줌마가 전담하고 있다. 지난해 보건사회연구원이 실시한 조사를 보면 재산 관리를 부부 중 누가 결정하느냐는 질문에 부인이 결정한다는 대답이 2003년 14.8%에서 2006년 16.1%로 늘었다. 남편이 결정한다는 대답은 16.1%에 그쳤다. 나머지 67.8%는 부부가 함께 관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업주부의 재테크 활동도 활발하다. 대전에 사는 양인숙(54)씨는 3~4년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 전원도 켜지 못하는 컴맹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게임사이트에 들어가 ‘맞고’를 치고 서울에 있는 딸과 e-메일도 자유롭게 주고받는다. 양씨가 인터넷과 친해진 이유는 주식 때문이다. 예전부터 조금씩 주식 투자를 해오던 양씨는 실시간 거래를 하기 위해 인터넷을 배웠다. 양씨의 컴퓨터 선생님을 자청하고 나선 이는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 최동원(58)씨다. ‘부동산 답사’ 다니는 전업주부
지금 같으면 남편이 반대해도 본인 의견대로 할 것 같다는 양씨는 TV 경제 채널에서 재테크 정보를 얻는다. 거의 하루종일 TV를 틀어놓지만 드라마는 딱 한 가지만 본다고 했다. “신문의 경제면을 보면 주식 투자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CEO 기사도 열심히 읽어요. 최고경영자를 알아야 전쟁에 질지 이길지 알 수 있거든요.” 전문가 못지않은 설명을 늘어놓는 양씨의 모습이 요즘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대홍기획이 수도권 6대 지역 아줌마 54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본인 명의로 자산을 소유한 아줌마가 33.9%이고, 최고 재테크 방법은 부동산이 49.3%로 1위였다. 그 다음으로 저축(24.8%), 펀드(15%), 주식(5.4%), 보험(5.4%) 순이었다. 압구정동에 사는 한정숙(33)씨는 “요즘 강남에서는 주로 미술품이나 백화점 명품 경매 같은 데 참여한다”고 말했다. 삶을 즐기면서 돈도 벌겠다는 의미다. 흥미로운 것은 취업주부보다 전업주부들 사이에서 고급 재테크 정보가 오간다는 사실이다. 같은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0%가 취업주부보다 전업주부의 정보가 더 돈이 된다고 답했다. 아줌마들은 부동산 중개소에서 차를 마시며 정보를 나누기도 하고 ‘대표 엄마’라 불리는 아줌마의 정보에 따라 ‘부동산 답사’를 다녀오기도 한다. 점점 높아지는 교육열도 아줌마들을 부추긴다. ‘진화’하는 아줌마 개념 1960년대 아줌마는 ‘친척 아주머니’를 줄여 부르는 말이었다. 집안 친족을 가리키는 단어였던 것. 이런 가족 단어가 점점 일반화되면서 옆집 아주머니나 식당 주인을 부르는 말로도 쓰이게 됐다. 당시 공장의 여직공들 중에서 일이 서툰 이를 낮춰 부르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70~80년대는 경제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던 때였다. 일반적으로 결혼한 여성을 일컬어 아줌마라고 불렀고, 소비시장이 발달하면서 아줌마는 소비자로서 역할을 분담 받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아줌마는 ‘자기 희생’을 대표하는 ‘어머니’로서 가정에 자리했다. 내복이 삐져나온 통치마, 촌스러운 파마머리와 함께 점점 살기 좋아지는 세상에서 한 푼이라도 재산을 모으기 위해 시장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억순이’가 아줌마의 대표 이미지였다. 88년 서울올림픽이 지나고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자 아줌마들은 조금씩 자아를 찾기 시작했다. 처녀 시절 젊은 외모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인생활을 즐기는 ‘미시족(missy+族)’의 시대가 온 것이다. 미시족은 일본의 한 패션회사가 70년대 만든 조어로, 90년대 초 우리나라의 한 여성복 업체가 커리어우먼을 동경하는 주부를 타깃으로 광고에 활용하면서 일반명사가 됐다. 그때 유행했던 광고 문구가 ‘늘 애인 같은 아내’ ‘아줌마 패션은 노, 미니스커트는 오! 예’였다고 한다. 아줌마가 기업의 중요한 고객으로 떠올랐음을 시사한다. 처녀 못지않게 ‘잘나가던’ 아줌마들은 97년 외환위기 때 위기를 맞는다. 아줌마들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된 시점이었다. 하루아침에 ‘명퇴자’로 나앉은 남편을 대신해 바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보다 안정적이고 좋은 자리에 자녀를 앉히려는 노력이 높은 교육열로 나타났다. 아들의 결혼을 앞둔 50대의 한 주부는 “IMF 전후로 아이들 등·하교를 위해 차를 사는 아줌마들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또 남편의 월급에만 기대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재테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런 변화가 2000년대 들어 아줌마 사회에서의 인터넷 대중화로 ‘혁신’을 일으킨 것이다. 최근에는 ‘골드 미스’ ‘줌마렐라’ ‘쩐모양처’ 같은 신조어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회사일과 재테크 등의 문제를 상의할 수 있는 남편의 동료라는 의미에서 남편(Husband)과 친구(Friend)를 더한 ‘허스프렌드(Hus-friend)’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실제 능력 있는 골드 미스들의 연상연하 커플도 늘고 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사랑한다면 나이는 상관없다’는 질문에 여자의 53.9%, 남자의 44.9%가 ‘그렇다’고 답했다. 실제 통계청 자료에서도 1995년 8.7%에 불과하던 연상연하 결혼 커플이 2006년 12.8%로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기업들이 모시는 아줌마 소비자 물론 새로운 ‘아줌마 트렌드’를 몇몇 부촌 지역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한정 지을 수도 있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아줌마도 본인과 자녀의 나이, 현재 사회생활 여부에 따라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대를 아우를 수 있는 아줌마상이 보다 역동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아줌마들의 ‘입김’이 세지면서 가정을 넘어 기업들도 ‘아줌마 약발’을 노리고 있다. 아줌마닷컴, 미즈닷컴, 미시USA, 마이클럽닷컴 등 아줌마를 대상으로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운영되는 커뮤니티가 제품의 판매뿐 아니라 출시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황인영 아줌마닷컴 대표는 “아줌마들의 77.9%가 모임이 있고 평균 온·오프라인 모임을 5.1개씩 하고 있어 이런 구전 활동은 거의 ‘소용돌이’에 가깝다”며 “요즘 아줌마들은 TV 광고보다 아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설명했다. 최근 아줌마들의 자가운전이 늘면서 정유회사가 아줌마를 대상으로 마케팅 활동을 벌이거나, 금융권에서 여성 전용 상품을 내놓는 전략들이 모두 아줌마들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다. 남성을 주고객으로 한 국내차 대신 수입차를 찾는 아줌마들 때문에 수입차 업계에서는 특별히 아줌마들이 많이 찾는 차들을 ‘사모님 차’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우디Q7, 렉서스EX300 시리즈 등이 대표적이다. 주류업계의 도수 낮추기 경쟁도 여성, 특히 소비력이 강한 아줌마를 대상으로 펼치는 마케팅의 일종이다. 김혜란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존의 성 역할이 최근 급변하면서 아줌마 역할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이라며 “아줌마 생활이 바뀜에 따라 금융·IT·자동차·주류 같은 산업의 마케팅이 달라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무엇보다 ‘아줌마도 여성’이라는 시각이 자리 잡은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말했다. |
'일반경제기사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도권 6대 지역 라이프 스타일 (0) | 2008.06.17 |
---|---|
빨래하던 손, 시장의 ‘큰손’ 되다 (0) | 2008.06.17 |
‘촛불’을 강력한 무기로 활용하라 (0) | 2008.06.17 |
中·日 ‘황금 시장’ 주도권 다툼 (0) | 2008.06.15 |
‘두 고집’ 금리 놓고 여러 판 붙어 (0) | 2008.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