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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 부자 만들어 준다더니 쪽박만…펀드의 배신

도일 남건욱 2008. 10. 30. 13:37
온 국민 부자 만들어 준다더니 쪽박만…
펀드의 배신
대다수 주식형 상품 반 토막 … 가입자들 ‘펀드통’에 잠 못 드는 계절
온 국민을 부자로 만들어 줄 것 같던 펀드가 국민을 쪽박 차게 만들 지경에 이르렀다. 웃음을 주었던 펀드는 스트레스와 근심의 주범으로 변했다. 빼자니 억울하고, 두자니 아깝다. 자신만만하게 ‘펀드=최고의 투자상품’이라고 외치던 저명한 금융계 CEO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통 보이지 않는다. 부자의 꿈에 취해 시골 농부도, 조그만 어촌 어부도 손에 쥐었던 펀드. 허망하게도 환상은 깨지고 가입자들은 배신감에 잠을 못 이룬다. 누가 누구를 배신했고, 누가 배신당했단 말인가. 대다수 국민은 신부 얼굴도 모른 채 장가 간 격이었고, 펀드 운용·판매사는 신부를 보여주지도 않고 ‘예쁘니 무조건 장가 가라’고 했다. 그 이후에 일어날 파탄은 모두 외면하면서 말이다.

세상 인심 변화가 빠르다지만 이렇게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을까? 불과 몇 달 전까지 ‘아직도 펀드를 안 하고 계십니까’라고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펀드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을 ‘금융 촌놈’ 취급하던 당당한 CEO들이 요즘 통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의 말을 듣고(혹은 믿고) 펀드가 ‘엘도라도’인 줄 알았던 사람들은 정작 지금 그 훌륭한 금융전문가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주가 지수가 2000에서 1800 정도로 떨어질 때는 스스로 판단할 여력이 있었다. 1500대로 무너지면서 주변의 일부 ‘촌놈’이 “펀드를 해지하라”고 했지만 “지금은 저점 매수의 기회”라거나 “지금이 적립식 펀드의 장점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라며 단호한 모습을 보였던 전문가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워런 버핏이나 벤저민 그레이엄, 존 템플턴 같은 듣기만 해도 대단한 사람들의 선례를 들었다. 역사적인 투자가들이 이럴 때 참고 견뎌 큰돈을 벌었다고 하는데 겨우 한 달에 50만원, 100만원 넣는 펀드 초보자들은 당연히 선지자들의 길을 따라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주가와 펀드 수익률은 속절없이 무너진다.

이제 지수는 1000 아래(10월 24일 기준)로 주저앉았다. 한국에 있는 모든 주식형 펀드가 연초 대비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금융전문가들이 나서 ‘상황이 왜 이렇게 됐고, 앞으로는 어떻게 전개될 것이니 얼마만 참으면 곧 엘도라도로 간다’고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이야말로 세계 금융을 주무르겠다던, 또는 가치투자로 보석 같은 기업을 발굴하겠다던, 펀드만이 노후생활을 풍요롭게 한다던 사람들이 나서서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한국의 저명한 금융 CEO들이나 펀드매니저들은 말이 없다. 전화를 해도, 만나자고 해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잘 보내던 e-메일 답장도 요즘엔 감감 무소식이다.

그러곤 신문광고를 통해 무미건조하게 ‘장기투자가 답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 장기가 도대체 언제까지인지, 장기간 투자 후엔 어느 정도 수익률을 기대하는지에 대해 선수들이란 사람들이 언급이 없다. 미국의 경제학자 케인스는 『전염성 탐욕』이라는 책에서 “장기적이라는 말은 지금의 일들에 대해서는 잘못된 지침이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무책임하게 ‘장기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라는 부탁이다. 물론 일단 돈을 계속 넣다 보면 주가는 다시 상승하게 마련이고 그때 귀신같이 수익을 실현하면 된다. 하지만 수억원, 수십억원의 연봉을 받는 금융전문가들이 제시하는 해법이 겨우 이 정도란 말인가? 한두 푼에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언제까지 인내를 강요하는 것인가?

 

‘펀드 선수’들은 다 어디로 숨었나


워런 버핏처럼 수십억 달러를 주무르고, 생활비 걱정 없는 사람은 장기투자가 가능하다. 하지만 생활인에게 만기가 없는 장기투자를 하라는 것이 과연 책임 있는 전문가가 할 이야기일까? 그런 사람에게 자기 월급의 10% 혹은 3분의 1, 심하게는 절반을 맡긴 투자자들은 배신감이 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돈 빌려서 투자한 사람들에게 그 말은 죽으라는 것밖에 안 된다.

배신감으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펀드의 배신은 감정 차원을 넘어선다. 서울 양천구에 사는 직장인 L씨(36)는 지난해 5월부터 펀드를 시작했다. 대기업에 다니고 미혼이라 여유자금이 좀 있었던 그는 한 달에 130만원을 중국펀드와 국내 주식형 펀드에 가입했다. 그의 수익률은 보나마나다.

그는 “원금만 2000만원 넘게 들어갔는데 지금 남은 돈은 1000만원 남짓”이라고 허탈하게 웃었다. L씨는 “올 초부터 주변에서 펀드를 해지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동안 넣은 돈이 아까워 그냥 끌고 왔는데 이렇게 됐다”고 후회했다. 대전에 사는 K씨(71)는 더 안타깝다. 10년 전 직장을 은퇴하고 2006년까지 자영업으로 자식들 결혼시키고 그럭저럭 먹고살던 그는 2006년 말 가게를 처분했다.

가게 팔고 빚 정리하고 남은 돈 1억5000만원을 한동안 은행에 넣어뒀던 K씨는 은행지점장으로 있던 6촌 동생의 말을 듣고 지난해 초 펀드에 가입했다. 당시만 해도 예금금리가 5%대 초반이라 6촌 동생의 말대로 노후생활비를 안정적으로 충당하려면 좀 더 나은 수익률이 필요했다.

브릭스, 주식형, 채권형 등에 골고루 분산 투자해 한동안 10% 이상 수익률이 나기도 했지만 지금 통장을 보면 속이 탄다. 전체적으로 원금에서 40% 가까이 손실이 났다. 더구나 부인(64)이 ‘펀드는 위험하다’며 극구 만류했지만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며 독단적으로 결정한 일이었다. 이대로 더 떨어지다간 앞으로 남은 노후생활도, 부인의 질책도 걱정이다.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B씨(40)의 상황은 더 급박하다. 그는 2006년 답십리에 아파트를 하나 샀다. 결혼 후 7년간 79㎡ 아파트에 살다가 마음먹고 네 식구가 살 큰 집으로 옮긴 것이다. 당시 4억원 정도 했던 아파트를 사느라 1억원의 빚을 진 그는 올 초 은행에서 5000만원을 대출해 주식형 펀드에 가입했다.

B씨는 “몇 년 동안 모은 돈을 집을 사느라 다 써 펀드로 큰 수익을 낸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다. 마침 올해 초 주식이 좀 하락하기에 그때가 적기인 줄 알고 펀드에 베팅했다. 올 초에도 전문가들은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올해 초 잠시 주춤하던 주식은 5월까지 다시 피치를 올렸다.

지수만큼 그의 펀드 수익률도 좋아졌고 잘만 하면 1억원에 달하는 빚을 단번에 반으로 줄일 수도 있을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가 가입한 펀드 수익률은 -40%를 넘어섰다. 지금 해지하면 절반 남짓 원금을 건질 뿐이다. 더구나 주택담보 대출 금리도 올라 이자부담도 늘고 있다.

B씨는 이제 펀드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하염없이 장기투자를 권유하는 금융전문가들이 무책임한 것 아니냐”고 울화통을 터뜨렸다. 원론적으로는 모든 투자의 책임은 투자자에게 귀속된다. 수익이 투자자에게 귀속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시중은행의 한 PB는 “수익이 난다고 투자자들이 펀드매니저나 회사에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손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한 증권사 지점장은 “일이 안 되면 다 남의 탓으로 돌리게 마련이다. 지금 증권사나 자산운용사가 그런 처지 아니겠느냐”고 하소연했다. 사실 지난해 한국의 펀드투자는 투자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심지어 어떤 투자자는 은행 창구에 가서 ‘미래에셋 주세요’라고 했을 정도였으니 그 대담함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쯤 되면 펀드를 투자라기보다는 고금리 예금상품 쯤으로 인식한 듯하다. 투자자들이 지난해 펀드에 가입할 때 ‘원금 손실’이라는 말은 사문화돼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은행 창구, 증권사 창구에서도 ‘그 정도는 무시하셔도 된다’거나 ‘요즘 장세로 보면 그럴 일 없다’는 식의 말을 쉽게 했다.

투자자들도 ‘원금손실’이라는 말에 주목하지 않았다. 몇몇 신중한 사람이 원금 손실 가능성을 이유로 펀드 가입을 꺼리면 그런 사람은 소심하거나 돈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 받곤 했다. 지금까지 펀드에 가입하지 않은 직장인 Y씨(29·여)는 “올 초까지 펀드가 없다고 하면 ‘왜?’라고 다들 물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펀드에 가입했지만 펀드매니저가 누구인지, 그의 경력이 어떤지, 이 상품의 구조가 어떤 것인지, 회전율은 어느 정도인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가입한 펀드의 수수료가 몇 %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심한 경우는 자신이 가입한 펀드가 주식형인지, 채권형인지, 해외펀드인지, 국내펀드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시중은행에 다니는 이정수(33)씨는 “친척 중에 한 분은 펀드를 가입한 사람이 통장을 들고 와 이게 무슨 상품인지 설명해 달라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개인보다 운용사 탐욕이 더 컸다”


펀드평가사의 한 임원은 “펀드를 제대로 이해하고 가입하는 사람이 전체 10%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투자설명서가 지나치게 전문용어로 구성된 것도 문제지만 가입자들도 펀드를 공부해야 하는 투자상품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투자자의 책임일 리는 없다. 불완전 판매도 흔했다. 최근 2년간 은행에서 대출이나 예·적금 가입 시 펀드 가입 권유나 카드 발급을 권유 받지 않은 사람을 찾기 어렵다.

문제는 펀드 가입을 권유하는 은행원들도 펀드를 모른다는 점이다. 가입자와 권유자 간의 대화는 선문답에 가깝다. 판매만 문제는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운용사도 고객의 이익보다 회사 매출에 더 관심이 많았다. 주식 전문가인 박경철씨는 “한국의 펀드 버블은 투자자의 탐욕보다 운용사의 탐욕이 더 컸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름만 비슷할 뿐 부실한 펀드를 연이어 만들어 냈던 운용사들이 투자자들에게 펀드는 최고의 자산 증식 상품이라고 뻔뻔하게 말했다”고 일침을 가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운용되는 펀드는 1만개가 넘는다. 이는 미국의 8100여 개보다 많다. 금융 대국인 미국보다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날림 상품’이 많다는 얘기다.

한 펀드매니저는 “이른바 ‘버려진 펀드’는 사실상 잘나가는 다른 펀드를 받치는 자금 역할을 한다”고 털어놨다. 쉽게 말해 고객의 돈으로 주력 펀드의 실적을 떠받치는 셈이다. 펀드를 운용하는 운용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고객에게 밝히지 않는 점도 문제다. 본부장이나 총괄매니저만 밝힐 뿐 펀드매니저 개개인의 경력이나 인적사항은 투자설명서로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상품의 특성을 알 수 있는 각종 지표들도 투자자가 일일이 펀드평가사의 자료를 뒤져야 하는 불편함이 문제다. 특히 급속히 펀드로 돈이 몰리면서 거대 운용사는 자본시장의 공룡으로 등장했다. 한 증권사 임원은 “올 초 모 거대 자산운용사의 대리가 한 증권사의 리서치 헤드(임원)를 찾아가 자사펀드가 투자한 종목에 대해 부정적인 보고서를 쓰려고 하자 ‘이렇게 하면 더 이상 이 회사에 자금 못 준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결국 보고서는 수정됐다. 이런 판에도 금융회사들은 ‘한국 주식시장의 가능성을 믿고 투자하라’고 광고했다. 펀드의 사후관리도 문제다. 한 증권사 직원은 “어떤 펀드는 판매 후 2년 동안 단 한 번도 운용 내용을 고지하지 않았다”며 “아파트 관리비가 사후 관리에 대한 비용이듯 펀드 수수료도 사후 관리비가 포함돼 있는데 이런 펀드는 판매수수료를 토해 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한국의 펀드 붐은 애초부터 배신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지난해 주식은 급상승했고, 펀드를 파는 곳은 늘어났으며, 펀드 전도사들은 펀드가 도깨비 방망이인 양 말했다. 펀드를 사는 사람도 펀드를 파는 사람도 펀드가 무엇인지 모르고 달려들었다. 주가가 좋고, 경제가 좋아져야 펀드도 자산증식의 수단이 되는데 마치 펀드만 들면 모두 부자가 되는 양 생각했다. 하지만 요술방망이는 동화 속 세계에서나 존재한다. 투자자들도 미련을 버리고 냉정한 현실을 직시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