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학기사모음

세계 두번째로 태어나 사람보다 귀하신 돼지

도일 남건욱 2009. 7. 18. 13:27
세계 두번째로 태어나 사람보다 귀하신 돼지
[조선일보] 2009년 07월 18일(토) 오전 03:03   가| 이메일| 프린트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먼저 소독복을 입고 덧신과 장갑, 멸균 마스크를 써야 한다. 만약 소지품이 있다면 반드시 강력한 살균제를 뿌려야 한다.

이 절차를 마쳐야 비로소 그가 사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실내로 들어오는 모든 물품을 소독하는 장비를 비롯해 공기 정화장치가 24시간 돌아가는 까닭에 전기요금만 월 250만원이 드는 곳이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좀 더 '깨끗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2500만원에 달하는 인큐베이터 안에 산다.

그는 식성도 까다롭다. 방사선 동위원소처리로 멸균된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 한 번에 많이 먹지도 않는 까닭에 두 시간마다 한 번씩 하루에 꼬박 12번 음식을 가져다 '바쳐야' 한다. 24시간 내내 한 명 이상의 '하인'이 그의 동태를 살펴야 한다.

사람 이야기가 아니다. 18일로 태어난 지 107일을 맞이하는 '지노(Xeno)'라는 이름의 한 수퇘지 이야기다.




◆인간보다 귀한 대접 받는 돼지

지노는 경기도 수원 에 있는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의 특별 돈사에 산다. 병균 침입을 막는 'SPF(Specific Pathogen Free·특정병원균제어) 돈사'다. 이곳에서 박사급 연구진 4명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를 돌본다. 많이 줄어든 인원수다. 태어날 땐 30여명의 석·박사가 달라붙었고, 생후 한 달 동안은 15명이 그의 건강 상태를 살폈다. 인큐베이터 등 장비와 소독복·사료 등 1년에 지노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1억7560만원 정도라는 것이 농진청의 설명이다. 하루 평균 48만원이다. 그의 '양육'을 책임지는 우제석 연구관은 "솔직히 내 아이 건강보다 지노의 건강 상태에 더 마음을 졸인다"고 고백했다.



지노가 인간보다 더 귀한 대접 받는 이유가 있다. 지노는 국내에선 처음이자 세계적으로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태어난 장기이식용 형질전환 복제 미니돼지다. 돼지에서 인간으로 장기 이식을 할 경우 신체가 초급성 거부 반응을 일으켜 15분 내에 이식된 장기가 괴사한다. 지노는 이 같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제거한 체세포를 복제해 태어났다. 손상된 인체 장기를 대신할 장기를 제공하는 돼지를 만들기 위한 연구 프로젝트의 중심에 있는 '귀하신 몸'이다.

복제에 앞서 거부반응 유전자를 제거하는 체세포를 만들어야 하는 만큼 형질전환 복제돼지의 생산과정은 보통 복제돼지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 체세포를 만들기까지만 3년이 걸렸으며 이후 100여마리의 대리모에 각각 100개의 복제 수정란을 이식, 그중에서 유일하게 태어난 것이 바로 지노다. 현재 연구실장을 맡고 있는 박응우 연구관은 "보통 돼지가 4마리 이하의 새끼를 가질 경우 어미가 새끼를 없다고 인식하고 유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지노의 어미돼지는 지노만 가졌음에도 유산하지 않았다"며 "기적에 가까웠던 일"이라고 회상했다.

지노가 태어난 뒤에도 안심은 금물이다. 장기이식용 연구를 위한 돼지인 만큼 최대한 병원균을 차단해야 한다. 특정 병원균을 차단하는 인큐베이터 속에서 키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료도 25㎏짜리 한 포를 사와 500g씩 일일이 포장을 한 뒤 경기도 여주군 의 한 방사선 처리 공장에 보내 멸균처리를 한다. 물론 마시는 물도 멸균 처리한다.

◆'돼지의 왕자' 지노를 키우는 엄마들의 고충

지난 10일 오후 형남웅 실무관이 소독복을 챙겨 입고 지노가 사는 인큐베이터 앞에 섰다. 인큐베이터에 뚫린 구멍에 연결된 장갑에 손을 넣더니 지노의 몸을 긁어줬다. 지노가 반가운 듯 번쩍 일어나더니 그의 손에 얼굴을 비벼댔다. 형 실무관이 아기에게 말하듯 "심심했지? 형이 놀아줄게"라며 지노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원래 다른 새끼들이나 엄마와 대화를 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으니 내가 대신 놀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형 실무관을 비롯, 우 연구관과 이주영 실무관은 실질적으로 지노를 키우는 '엄마들'이다. 지노의 탄생부터 100일까지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보다 지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우 연구관은 "지금은 건강하고 장난도 많이 치지만 태어났을 때 지노는 약골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10㎏의 정상체중인 지노가 태어났을 때 몸무게는 460g. 일반 미니돼지가 태어났을 때의 평균 중량인 642g의 70%에 불과했다.

실제로 지노가 태어난 지 나흘째 되던 날 새벽 이들에게 '악몽'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 4월 7일 오전 5시쯤 형 실무관이 우유 급여를 위해 인큐베이터 안의 지노를 깨웠다. 그러나 지노는 일어나지 않았다. 우 연구관과 이 실무관이 달려왔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형 실무관은 지노의 온몸을 마사지했다. 3분, 5분, 시간이 흘러가다 모두가 절망했을 때인 10분쯤 후, 형 실무관의 계속된 손길에 지노가 마침내 일어났다. 그는 "지금은 지노의 '시체놀이'라고 장난삼아 말하지만 당시는 정말 지옥 같았다"며 "새끼 미니돼지의 경우 잠에서 깨지 못해 그대로 죽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언제 또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만큼 이들은 번갈아가며 24시간 내내 CCTV로 지노의 일상을 관찰하고 두 시간마다 한 번씩 인큐베이터 속 지노를 확인한다. 첫 한 달 동안은 계속되는 야근을 감당할 수 없어 같은 실 소속 직원 10여명이 번갈아가며 밤과 주말에 '지노 엄마' 노릇을 맡았다.

'이종이식(xeno-transplantation)'이란 단어를 줄여 지노라는 이름이 붙기 전까지 이 새끼돼지의 별칭은 '돼지의 왕자'였다. '왕자'가 살균 처리된 '고급 음식'을 먹는 동안 엄마들은 사무실 한구석에서 컵라면에 햇반을 넣어 만든 '라면죽'을 먹었다. 그 사이 형 실무관은 8㎏이 쪘고, 이 실무관은 결혼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지난 5월 결혼했다.

지노의 건강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어선 요즘은 그나마 예전처럼 '피 말리는' 근무 태세는 아니지만, 여전히 이들의 관심은 온통 지노에 쏠려 있다. '지노의 엄마'들은 이날도 이런 대화를 나눴다.

"지노가 인큐베이터에서 나오면 장난감을 뭐로 해주지? 고민이네."

"축구공이나 농구공 같은 거 어때? 무지 좋아할 텐데."



[수원=김우성 기자 raharu@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