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의학을 배우면서까지 생명을 이해하려 했던 과학철학자

도일 남건욱 2010. 5. 27. 18:39

의학을 배우면서까지 생명을 이해하려 했던 과학철학자

[사진 한 장에 담긴 과학자의 삶]<9> 조르주 캉길렘

2010년 0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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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 캉길렘은 ‘정상과 병리’라는 개념을 도입해 생명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지난주 과학계의 가장 큰 이슈는 아마도 미국 크레이그 벤터 연구소가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발표한 ‘인공생명체’일 것이다. A라는 박테리아의 게놈을 통째로 합성한 뒤 게놈을 들어낸 B라는 박테리아에 집어넣었더니 박테리아가 죽지 않고 살았을 뿐 아니라 A의 특성을 띠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박테리아는 엄밀히 말해서 ‘인공생명체’는 아니다. 논문의 제목도 ‘화학적으로 합성된 게놈이 조절하는 박테리아 세포 창조’다. 진정한 인공생명체라면 인공 게놈이 생명체를 이루는 생체분자들의 수프(soup)에서 자기조직화로 세포를 구성해 생명체로 탄생해야 한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 라는 데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이번 연구 결과를 보다가 문득 십수 년 전 읽은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캉길렘의 책 ‘정상과 병리’가 떠올랐다. 석사 과정을 마치고 대기업의 연구소에서 일하던 기자는 대학원 때부터 품던 의문, 즉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일까를 가끔씩 고민하고 있었다. 물리학과 화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생물에서 생물을 만들지 못하는 걸 보면 둘 사이에는 뭔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빛의 세기만을 반영하는 흑백필름으로는 빛의 파장에 대한 정보까지 필요한 컬러사진을 본질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듯이.

●철학 가르치며 의학 공부

조르주 캉길렘은 1904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1937년부터 교직에 몸담았다. 주로 시간과 기술이 그의 관심사였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병원을 다니며 의학을 공부하더니 194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의학에 몰두, 의학박사 논문을 쓰기에 이른다. 이 논문을 1943년 책으로 낸 게 ‘정상과 병리’다.

기자가 무슨 계기로 이 책(1996년 한글판이 나왔다)을 읽게 됐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책을 보다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는 다양한 기준을 발견하고 쾌재를 올린 기억이 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물리학이나 화학에는 정상과 비정상(병리)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구분은 오로지 생명체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

물리학의 법칙이나 화학의 법칙은 건강한지 질병이 있는지에 따라 변화하지는 않는다. (중략) 음식물을 배설물과 구별하는 것은 물리-화학적 현실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가치이다. 마찬가지로 생리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을 나누는 것도 물리-화학적인 유형의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생물학적 가치이다.

캉길렘은 ‘생명에는 내재하는 규범이 있다’고 전제하고 병이 들었다는 건 이 ‘규범’이 바뀐 상태라고 주장했다. 병을 고친다는 건 이 일탈된 규범을 원래의 규범에 가깝게 되돌리는 과정이라는 것. 그는 ‘불안정성과 불규칙성’을 생명현상의 본질적 성질로 보는데, 따라서 생명현상의 결과에 대한 통계적 방법, 즉 평균에 대한 일탈의 정도에 따라 정상과 병리를 구분하는 방식을 거부한다.

인공게놈이 들어간 박테리아(위)가 살아남아 번식한 모습(아래). 물리-화학적 법칙은 여전히 생물의 본질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생명체를 조작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를 만들어내고 있다. (사진 사이언스)

캉킬렘은 1963~1966년 ‘정상과 병리’ 2부를 집필했는데 여기서 “질병은 잘못 만들어진 것이며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라며 “아귀가 잘 맞지 않은 접힘선 같은 의미에서 잘못된 것을 말한다”고 덧붙였다. 즉 ‘오류’의 개념을 병리학에 도입했다. 캉길렘의 혁신적인 사고는 미셸 푸고를 비롯해 많은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1995년 사망했다.

●논쟁거리 넘쳐나는 생명과학 최첨단

크레이그 벤터 박사팀의 인공생명체 연구는 1995년 미코플라스마 제니탈리움이란 기생 박테리아의 게놈을 해독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과 60만 염기쌍, 500여 유전자로 이뤄진 이 생명체는 그 뒤 인공게놈을 만드는 모델이 됐다. 연구자들은 이 박테리아 게놈에서 유전자를 빼내는 실험을 통해 100여개를 없애도 살아갈 수 있음을 발견했다.

사실 게놈을 바꿔치기 하는 실험은 2007년 성공했으며(물론 이 때는 자연 박테리아의 게놈), 게놈합성은 2008년 성공했다. 그러나 합성게놈으로 바꿔치기 하는 실험은 실패해 왔다. 결국 미생물을 바꾸는 우여곡절 끝에 실험은 성공했지만 이번 실험에 대한 학술적 가치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진정한 인공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에)과 함께 이런 방법이 초래할 윤리적 딜레마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사실 줄기세포 치료나 개인게놈 분석 등 물리-화학적 방법을 통한 생명체의 조작 내지는 정보 추출이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고민거리들을 제공하고 있다. 캉길렘의 작업이 현재 맞닥뜨린 곤혹스러움을 해결하지는 못하겠지만 어떤 영감을 주지는 않을까. 그가 살아있다면 오늘날 생명과학의 이런 ‘현기증 나는’ 발전에 대해 어떤 말을 할지 무척 궁금하다.


강석기 동아사이언스 기자 suk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