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소송에 임하는 자세

도일 남건욱 2011. 7. 28. 13:10

1. 낯선 이름 ‘소송’

“이 약 좋아요?”
제가 약국하던 시절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과연 뭐라 답해야 할지요.

“변호사님, 어떻게... 소송이 가능할까요?”
요즘 가장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그게 말이죠...음...”
그때나 지금이나 답하긴 곤란하긴 매한가지입니다.

이제 약사회도 주요한 사업방법의 하나로 소송을 고려하거나, 실제로 소송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최근 보건복지부가 조제료 수가에 관한 보건복지부장관의 고시(고시의 정식 명칭은 ‘건강보험 행위 급여․비급여 목록표 및 급여 상대가치점수’ 개정 고시‘입니다. 간단히 ’조제료수가고시‘라고 하겠습니다.)를 개정하여 의약품관리료를 대폭 삭감하자 지역 약사회가 위 고시의 효력을 정지시키고자 가처분을 신청한 것이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일부 단체가 ’의약외품 범위지정에 관한 고시‘에 대하여 행정소송을 계획하였다가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소송이 거론되는 일은 많아졌으나, 약사회나 약사들에게 있어 소송은 아직 낯선 존재인가 봅니다.

약사회에서 일하는 임원들조차 소송의 기획, 소송 수행 등에 있어 구체적인 매뉴얼을 가지고 있지 않은 데다 소송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조금 민감한 주제가 될 수도 있지만 조제료수가고시에 관한 소송 과정을 지켜보며 제가 느꼈던 바를 되짚어 보겠습니다.

독자들에게 ‘고시에 대한 행정소송’이란 무엇인지 간단히 소개드리는 것이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거기에 조금 욕심을 보태자면 이 글이 약사회가 수행하는 소송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기대합니다.

2. 고시에 대한 행정소송

우리가 흔히 말하는 ‘행정소송’은 행정청으로부터 행정처분을 받은 자가 그 처분의 취소나 무효를 구하는 소송, 즉 처분에 대한 취소소송과 무효확인소송을 의미합니다. ‘행정처분’이란 행정청이 국민에게 하는 명령으로서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보건복지부장관이 고시를 만들어 시행하였다고 하여 그 행위가 처분이 될까요? 대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고시는 그 자체로서는 그 수범자에게 직접적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 수범자가 고시에 규정된 내용을 위반하면 그 때 행정청에서 일정한 제제를 가하는데, 바로 그 제제가 수범자에게 직접 불이익을 주는 ‘처분’입니다.

따라서 고시를 취소하여 달라고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고시를 위반하여 행정처분을 당한 사람만이 행정소송이 가능하고, 소송을 하는 과정에서라면 고시가 위법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다만 조제료수가고시는 보통의 경우와 다릅니다. 조제료수가고시가 시행되면 보건복지부장관의 다른 행위가 없어도 곧바로 약사들은 보험청구액이 삭감 당하는 불이익을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위 고시는 약사에게는 실질적인 처분과 같고, 곧바로 고시를 대상으로 한 행정소송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고시를 ‘처분적 고시’ 라고 합니다.

반면 의약외품의 범위지정 고시는 약사들에 대한 처분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이 고시가 약사들의 독점적 판매권을 잃게 하여 간접적으로 경제적 불이익을 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약사들의 권리, 의무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약사들이 위 고시를 대상으로 한 행정소송을 제기하여도 원고 적격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판결을 받게 됩니다. 반면 제약회사는 원고 적격이 있습니다. 보건복지부장관이 위 고시에서 제약회사들에게 품목허가의 자진 반납을 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각하’판결을 받는다고 하여 소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각하 대상인지 여부도 소송과정을 모두 마친 후 판결의 선고를 통해 결정되므로 소장을 접수시키면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송이 진행됩니다.

소제기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면 각하판결을 감수하고 소를 제기고, 변론 과정에서 하고 싶은 주장을 하면 됩니다.

사실 저와 뜻을 같이 하시는 몇몇 분들이 각하 당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의약외품 범위지정 고시의 무효를 구하는 행정소송을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만 주변의 여러 사정에 의해 무산되었습니다.

3. 소송을 할까, 말까?

소송을 해야 할지 혹은 하지 말아야 할지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요? 소송을 고려하는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조제료수가고시에 관한 소송을 준비하시던 분들도 이 문제로 제게 문의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받았던 질문이 바로 “소송이 가능할까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질문 자체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모호합니다.

이 질문이 “소제기가 가능한가요?”라는 의미라면 앞의 설명과 같이 “당연히 가능합니다.” 라고 답해야 했겠죠.

반면 “소를 제기하면 승소할 가능성이 있나요?”라는 의미라면 “승소할 가능성이 낮습니다.” 라고 답해야 했겠지요.

당시 제가 소속되어 있던 법무법인이 의사들의 백내장수가인하고시에 대한 행정소송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은 신청 후 곧바로 기각되었고, 본안소송 역시 1심에서 패소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의 진정한 의미는 아마도 “소송을 해서 약사회가 얻는 이익이 있느냐?”라는 것이 아닐까요?

먼저 문제점을 지적해야겠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소송을 준비하면서 전화로 간단히 즉답을 구하여 그 답에 따라 소송 여부나 규모를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떤 변호사도 이런 전문적 사안에 관하여 ‘즉시’ 정확한 자문을 할 수 없습니다.

평소 이 문제를 고민해 왔던 저도 그럴진대 평생 약업분야에 관한 소송을 단 한건도 수행해 본 경험이 없는 변호사라면 무슨 수로 정확히 즉답할 수 있겠습니까?

좋은 방법은 변호사에게 의견서를 써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물론 의견서를 요청할 때 변호사에게 현 상황에 관해 충분한 설명을 해야 합니다. 변호사가 의견서를 쓰려면 상당한 조사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검토되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의견이 나오는 겁니다. 비용을 지급하게 되더라도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의견서를 받아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그 변호사가 약업분야에 대해 충분한 경험이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변호사 선임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호사들로부터 제안서를 받아야 합니다. 제안서에 기재된 소송의 핵심쟁점, 소송 진행 전략, 소송 비용, 소송의 효과 등을 비교하여 그 내용이 가장 충실하고 약사회에 요구에 부합한 안을 낸 변호사를 선임해야 합니다.

제안서는 그 자체로 좋은 전략매뉴얼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약사회가 소송을 해서 얻는 이익이 무엇일까요? 생뚱맞은 답변을 드려야겠습니다.

약사회가 약업계 전체의 명운을 건 사안에 대해 소송을 검토하면서 변호사에게 소송의 실익을 묻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변호사가 기각 혹은 인용이라는 소송의 승패를 예상해할 수는 있어도
그 소송이 갖는 사회적, 정치적 의미와 효과를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즉 소송을 하겠다고 결정하는 일은 약사회의 몫입니다. 소송의 의미를 변호사에게 찾아달라는 말은 질 것 같으면 하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입, 의뢰인의 칼에 불과합니다. 결국 소송을 진행하는 자는 당사자입니다. 소송을 해야겠다고 결정하는 것, 이 결정을 힘 있게 추진하는 것은 약사회가 해야 할 몫입니다.

4. 반성과 변명

보험수가 조정과 의약품의 슈퍼 판매 문제가 복잡한 법적 쟁점을 담고 있어 법률가의 역할이 꼭 필요했습니다. 제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었고, 열심히 일할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소송을 꼭 해야 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 되자 제가 앞장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는커녕 어디에 끼어야 할지 헤매다 맡은 일 하나 없이 중요한 시기를 지나쳐 버렸습니다.

비굴한 변명을 하자면 약사회를 비롯한 여러 약사 단체들의 용기 있는 결정이 아쉬웠습니다. 변호사가 소송을 부추긴다는 말을 들을까 움츠러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약사회는 약사법 개정 저지에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앞서 돌아 본 소송들에 대한 아쉬움은 접어야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과거를 돌아보는 이유는 그 중 어떤 것을 미래에 넘겨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