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헌법을 만들었다는 바이마르공화국이 끔찍한 나치 제국으로 바뀌는 데는 불과 3년이 걸리지 않았다. 망상에 사로잡힌 지도자와 집단 최면에 걸린 민중은 5000만 명을 죽임으로 내몬 세계 전쟁을 일으켰다. 1500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전과(1차 세계 대전)도 있었기에, 독일에 대한 연합군의 응징은 가혹했다. 나라는 동서로 갈렸다.
하지만 독일은 빠르게 재건했다. 라인강에서 기적은 시작됐다. 지도자를 잘못 뽑은 악몽 같은 학습 효과로 독일 국민은 “정치는 일류가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파시스트와 포퓰리스트를 경험한 그들은 ‘책임 정치’에 나라의 명운을 걸었다. 이후 독일 정치인들은 막스 베버가 말한 소‘ 명으로서의 정치’를 실천했다. 연방제인 독일은 지방 정부에서 검증된 정치인이 최고 권력에 올라 안정되고 일관된 정치를 폈다. 나라는 부국의 길을 걸었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제2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이 책은 흔치 않은 독일 연구서다. 책 제목처럼 우리가 꿈꾸는 ‘넥스트 코리아’의 모델을 독일로 삼는다. 독일에서 공부한 저널리스트출신 교수인 저자는 서문에 “독일의 재발견이 이 책의 출간 목적”이라며 “독일이 강한 이유와 국민의 만족도가 높은 비결을 파악해 적용하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다”라고 썼다.
독일은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다. 2차 세계 대전 후 분단됐고, 라인강과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자원이 많지 않고, 제조업이 강하며,수출로 먹고 사는 점도 비슷하다. 단일 민족이며, 집단 문화적 성격이 강하고, 사회적 평등에 대한 요구와 갈망이 강한 것도 공통점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게 있다. 독일은 헌법에 “독일 전역의 생활수준이 비슷한 수준을 보여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연방국가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균형 발전은 이 나라의 근본 가치다. 또한 독일은 입시 지옥이 없고, 대학 등록금이 없으며, 사교육이 없다. 동시에‘미텔슈탄트(중소기업)’가 나라 경제를 이끌고, 세계에서 휴가가 가장 길며, 청소년이 노동자를 꿈꾸고, 노사가 싸우지 않으며, 떼법이 통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역대 독일 총리의 자녀·측근들이 부정부패에 연루돼 감방에 간 적이 거의 없다.
저자는 “독일의 경제적·정치적 성공은 무엇보다 국민, 기업, 정부가 삼위일체가 되어 성실하게 일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파보다는 민생과 국익을 우선시하는 정치 문화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서방으로의 긴 여정』으로 잘 알려진 하인리히 빙클러 베를린 홈볼트대 교수가 “정파의 이익보다 국민의 이익, 국가의 미래를 먼저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강한 독일이 가능했다”고 말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헬무트 콜(1982~1988) 총리의 통일 추진, 게르하르트 슈뢰더(1998~2005)의 개혁, 앙겔라 메르켈(2005~현재)의 리더십이 보여준 공통점은 당파보다는 국익이 우선이며, 정치적 원칙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게 저자가 부러워하는 독일 정치다.
이 책에는 우리나라 여야 정치인들이 꼭 읽어봤으면 하는 대목이 있다. 독일의 보수와 진보를 설명한 글이다. 독일의 보수 진영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은 에르하르트 전 총리다. 1957년 기민당(CDU)이 내건 슬로건 ‘모두를 위한 풍요와 사회 공평성’은 에르하르트가 만든것이다. 이 슬로건은 이후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의 이론적 프레임이 됐고, 독일의 보수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인의 삶의 풍요와 사회 정의에 개입하는 모델을 만들어갔다. 저자는 “독일의 보수 정치세력은 개인 이익을 주요한 가치로 인정하면서도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는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며 “또한 스스로 오블리스 노블리제를 지키면서 관용의 정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의 진보 역시 과거의 낡고 묵은 이념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사민당(SPD)는물론이고, 1983년 의회에 입성한 녹색당은 환경운동을 컨셉트로 새로운 정치 문화를 만들어갔다. 그들이 내세운 환경 운동은 사회 전반에 퍼져 기성 정당이 수용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저자는 “독일이 강한 비결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새로운 대안을 찾아나서는 진보 세력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요즘 우리나라 여야 대선 후보들은 저마다 경제 민주화를 외친다.경제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만약, 경제 체제가 바뀌어야 한다면 정치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성찰은 없다. 그
래서 공허하다. 저자의 바람을 전하며 책 소개를 맺는다.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배경은 경제가 법,정치, 경제, 사회의 제 질서와 상호 불가분의 의존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영역을 뚝 떼어 따로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라는 큰 틀에서 국가 경영의 기본 원칙과 안정, 정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원칙이다. 한국도 이 같은 사상과 원칙을 수용해 우리에 맞는 합리적인 사회경제적, 정치문화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임기웅변식이나 정파마다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이를 초월하는 시스템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