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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걷고 덜 주기로 복지천국 물려준다

도일 남건욱 2012. 12. 4. 22:22

 

더 걷고 덜 주기로 복지천국 물려준다
일하는 사람 우대하는 스웨덴식 복지모델
글·사진 허정연 이코노미스트 기자
‘덜 걷고 더 주는’ 한국 대선주자 복지정책과 달라…100년 사이 끊임 없는 복지개혁도 배워야


북유럽의 복지천국인 스웨덴은 한국의 대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동시장의 유연화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취업 경험·기회 확대 등 스웨덴식 노동시장 정책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참여정부 시절인 2004년 7월 당시 권오규 청와대 정책수석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표부 대사로 내보내면서 “스웨덴 복지 모델을 공부해 오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스웨덴은 한국 사람 모두 부러워하고 배우려 하는 훌륭한 나라”라고 했고, 스웨덴은 노무현 정권 정책 참고서로 통했다.

2007년 대선 때도 비슷했다. 2006년 스웨덴 총선 결과 65년간 장기집권한 사회민주당이 우파연합에 패하면서 대선을 앞둔 한국 정치권은 또다시 스웨덴을 화두로 꺼냈다. 한나라당 쪽에서는 스웨덴식 복지모델은 실패한 사례라고 주장하며 영·미식 모델을 대안으로 내세웠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패배는 곧 사회민주주의의 퇴조와 스웨덴 모델의 실패로 받아들여져서다.

올해 대선을 앞두고도 복지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복지정책의 재원인 세금 문제를 두고 ‘씀씀이를 줄이면 된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다. ‘복지 비용의 60%는 세출을 효율화하고 40%는 비과세·감면 축소, 세원 발굴 등으로 세입을 늘려 마련한다’는 것이다. 최근 스웨덴의 복지제도 개혁과 맥락이 비슷하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는 10월 9일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4개 복지국가의 한국 주재 대사들과 만났다. 집권에 성공하면 복지국가 5개년 계획을 즉시 실행하겠다며 복지정책의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두 후보 모두 ‘퍼주기식 복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웨덴은 다르다. ‘복지 천국’이라고 칭송 받고 있지만 끊임 없이 복지정책을 개혁하고 있다. 현재 개혁의 주체는 2006년 총선에서 65년만에 사회민주당을 누르고 정권을 잡은 우파연합이다. 2010년 재집권에 성공한 우파연합은 최선의 복지를 제공한다는 기본 원칙을 지키면서 좀 더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한 정책을 펼치려고 노력하고 있다.특히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스웨덴식 모델을 벤치마킹 할 만하다.

정부와 대기업이 나서 수출과 일자리를 늘리고 있다. 복지의 재원을 쌓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을 면치 못하는 영국(경제성장률 1%)과 미국(2%)에 비해 스웨덴은 3.7%로 양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실업률도 영국(8.1%)이나 미국(9.2%)과 달리 7.5%(2011년)로 낮다.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무역수지 흑자 비중 역시 영국(-1.9%), 미국(-3.3%)에 비해 6.3%로 훨씬 낫다. 이런 가운데 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 규모 역시 여전히 30%대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현재 스웨덴 정부가 펼치고 있는 복지 개혁의 핵심은 ‘일하는 복지’다. 일한 만큼 세금을 내고, 세금 낸 만큼 복지 혜택을 받는다는 원칙을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한다.

물론 스웨덴에도 여전히 ‘복지병’ 환자가 존재하고, 정부가 책임질 이민자도 증가했다.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늘린 사립병원과 학교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그러나 100년 간 고치고 다듬은 ‘MADE IN SWEDEN’ 복지제도는 과잉 복지 논란이 한창인 우리나라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한때 방만한 복지제도를 시행한 적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의 스웨덴은 일하지 않아도 복지 혜택을 주는 천국은 아니다. ‘노는 자들을 위한 천국이 아닌 일하는 자를 위한 천국’을 만들고 있는 스웨덴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유다.



#1. 프레드릭 라인펠트 스웨덴 총리는 올해 2월 정년퇴직 연령을 현행 65세에서 75세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인펠트 총리는 “국민들이 정년 연장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높은 수준의 복지 지출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달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지 언론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약 90%의 국민이 이 정책 시행에 반대했다. “65세에 퇴직한 후에 지난 30여 년간 납부한 연금을 되돌려 받으며 안정된 노후를 즐길 수 있는데 왜 10년 더 일해야 하느냐”는 게 다수 국민들의 생각이다.

#2. 최근 스웨덴에는 사립병원이 늘었다. 복지 지출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었다. 전체 병원 수인 79개(2009년 기준) 중 사립병원의 수는 7개로 많은 수치는 아니지만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사립병원은 아주 드물었다. 덩달아 사립약국도 증가했다. 스톡홀름에서 내과전문의로 일하는 교민 한기숙(59)씨는 “스톡홀름시내 약국의 50% 이상이 사립약국”이라며 “똑 같은 약도 사립약국 값이 더 비싸 국민들의 불만이 많다”고 말했다.

최근 새로워진 스웨덴식 복지모델의 키워드는 ‘지속 가능성’과 ‘효율성’이다. 2010년 통계에 따르면 스웨덴은 65세 이상 국민이 인구의 18%를 넘고, 80세 이상의 노인이 인구의 5%를 초과한 노령화 국가다. 이런 나라에서 프레드릭 라인펠트 스웨덴 총리는 ‘지속 가능성’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높은 수준의 복지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선 노동인구를 늘려 재원을 마련하거나 복지 지출을 줄여야만 하는 상황이다.

지속 가능성과 효율성 중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스웨덴의 복지정책은 고도의 경제성장에 힘입어 꾸준히 발전했다. 말하자면 고복지는 고성장의 결과였다. 그러나 고도성장기가 끝나고 저성장, 저출산, 고령화가 진행되자 스웨덴의 복지정책은 전환기를 맞는다. 더 이상 고도성장에 의해 지탱되던 복지제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그때부터 복지를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바꾸는 방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성장도 하고, 복지도 할 수 있는 길은 국민을 일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스웨덴 남부 옌쇼핑대학에 다니는 알렉산드라 멜비스트(23)씨는 학교 근처 66㎡ 크기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는 한 달에 3000 크로나(한화 약 50만원)의 집세를 낸다. 이를 위해 별도로 아르바이트를 하진 않는다. 정부 산하 기관인 중앙 학사지원국(CSN)에서 대학생들의 생활보조금을 지원해주기 때문이다. 스웨덴 대학의 등록금은 공짜다.

그러나 생활비가 없으면 교재를 구입하거나 기숙사 사용이 어려울 것을 고려해 CSN에서는 한 학기에 4만4600 크로나(한화 약 730만원)를 1~2%대의 낮은 이자율로 대출해준다. 최장 6년까지 지원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고, 이 돈은 직업을 구해 수익이 생기면 되갚아 나가게 된다. 스웨덴 정부는 내년 전체 예산 중 2.7%에 달하는 140조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스톡홀름의 한 IT회사에서 근무하는 사라 앤더손(31)씨는 최근에 승진했다. 1년 간 육아휴직 후 직장에 돌아온 지 6개월만이다. 그는 “업무에 공백이 있었지만 복직 후 업무 효율은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생후 19개월이 된 아이 양육은 현재 앤더손의 남편이 맡고 있다.

스웨덴 육아휴직제도는 부부 합산 최장 480일간 낼 수 있어 이를 고르게 분담한 것이다. 앤더손은 “육아휴직을 하더라도 390일간 기존 소득의 80%가 보장돼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며 “가정이 안정되니 업무 능력도 덩달아 높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스웨덴 복지 재원을 지탱하는 건 근로자가 내는 세금이다. 국민이 일을 해야만 지속적인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스웨덴에서는 복지 혜택도 일을 계속하기 위한 인센티브로 작용한다. 중앙 학사지원국의 생활보조금은 장래 일할 사람에 대한 투자 개념이다. 육아휴직 제도도 일하던 사람이 아이를 키우느라 집에 눌러앉는 일을 막기 위한 지원책이다.

누군가 양육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 세금을 거둘 수 없고, 그만큼의 복지 재원이 사라진다는 논리다. 일과 출산 사이에서 양자택일할 필요가 없는 복지제도 덕분에 스웨덴의 여성(20~64세) 중 80%가 직장에 다닌다. 이 노동력은 결국 모범 납세자가 되어 복지 재원으로 돌아온다.

 



복지 재원의 원천은 세금

스톡홀름 시내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나카(Nacka) 지역에 사는 오스카 리드그렌(47)과 산나 리드그렌(47) 부부는 자녀가 셋이다. 이들 부부는 막내 티아(8)를 낳을 때 ‘경제적인 상황’을 한번도 고려해본 적이 없다. 오스카씨는 “스웨덴에서는 아이를 키우는데 돈을 쓸 일이 별로 없다”며 “요즘 둘은 기본이고 3~4명을 낳는 것도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2009년 스웨덴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여성 1인당 평균 자녀수는 1.9명을 상회하는데 이는 1999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남편 오스카씨는 웹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며 주로 집에서 일한다. 그가 한 달에 버는 돈은 4만 크로나(약 650만원) 남짓. 스웨덴 사람들이 내는 평균 소득세율은 30% 내외. 하지만 월 수입이 3만5000 크로나 이상 되면 누진세율이 적용돼 최고한계세율이 59.09%(한국 38.5%)에 이른다. 누진세율이 적용된 오스카씨는 매달 소득의 50%인 2만 크로나를 세금으로 낸다. 소득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는 그는 “전혀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연금이 곧 저축


“물론 제가 세금을 많이 내는 건 맞지만 그게 공평한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우린 그만큼 많은 혜택을 받고 있어요. 예를 들면 아이들의 학비와 병원비가 무료에요.

아이가 15세가 될 때까지 아동수당 명목으로 한달에 1050 크로나(한화 약 17만원)가 나오는데 자녀가 많을수록 추가수당 폭이 커져요. 우린 애가 셋이나 있잖아요. 제가 낸 세금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돌려받고 있습니다.”

오스카씨가 내는 세금 2만 크로나 가운데 3000~4000 크로나는 국가연금 명목이다. 여기에 개인연금도 4000 크로나(약 65만원)씩 다달이 내고 있다. 한 달에 연금으로만 약 8000 크로나(약 130만원)를 내는 셈이다.

그는 “20여 년간 더 낸 후 65세가 되면 한 달에 2만~2만5000 크로나를 되돌려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연금이 있는데 개인연금에 추가로 가입한 이유가 궁금했다.

“우린 더이상 국가연금 시스템을 믿지 않아요. 우리 부모 세대는 65세가 되면 국가연금만으로 안락한 노후가 보장됐지만 우리가 그 나이가 되면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스웨덴 경제 사정은 20년 전에 비해 좋지 않아요. 복지 개혁으로 연금에 대한 믿음도 많이 사라진 상태고요. 제 주변사람들도 절반 이상이 개인연금에 가입했어요.”

2001년 정비된 새로운 연금제도의 핵심은 많이 내고 적게 받는 것이다. 개인의 기여 실적에 비례해 연금을 받고 경제성장률만큼의 이자율이 적용된다. 예전에는 30년만 일하면 연금을 100% 받을 수 있었지만 개정된 법에 따라 거기서 10년을 더 일해야 연금이 지급된다. 스웨덴 국립보험청의 연금 전문가 아르네 폴손은 “연금 개혁논의가 시작된 1990년 초반부터 개인연금 가입률이 크게 증가했다”면서 “국가에서도 개인연금 불입액에 대해 소득공제 혜택을 주고 있고, 금융회사도 개인연금 마케팅에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월 소득의 절반 이상이 세금과 개인연금에 들어가다 보니 부부는 별도의 투자나 저축은 하지 않는다. 산나씨는 “연금이 곧 저축”이라고 말했다. 부부가 연금 외에 가진 유일한 투자처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이다. 이들 부부는 8년 전, 약 250만 크로나를 대출 받아 600만 크로나(약 9억7600만원)에 이 집을 샀다. 산나씨는 “주택대출 이자율이 3%대에 불과해 집 가치의 절반 정도를 대출 받는 게 일반적”이라며 “집값이 계속 오르고 있고 나중에 아이들이 독립하고 나면 작은 집으로 이사하고 남은 돈을 노후자금으로 보탤 계획”이라고 말했다.

오스카씨는 6개월 전, 10년 넘게 타던 볼보 XC70을 팔고, 소형차인 피아트 판다로 바꿨다. 재택근무를 주로 하는 탓에 큰 차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스카씨 부부와 세 자녀들은 올 여름, 이 차를 타고 6주 간의 여름휴가를 떠났다. 올해 휴가지는 집에서 30분 떨어진 곳에 있는 여름별장이었다. 이 별장은 아내 산나씨의 형제 네 명이 돈을 모아 함께 마련한 작은 오두막집이다. 요즘 오스카씨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소박한 행복을 계속 누릴 수 있을까’다. 그는 “가족과 함께 좋은 음식을 먹고, 종종 여행을 떠나는 지금의 삶이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된다면 더 바랄게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