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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진흥하고 사회보장 확대하라”

도일 남건욱 2013. 1. 9. 10:55

“중소기업 진흥하고 사회보장 확대하라”

남덕우 전 총리·산학협동재단 고문
이필재 이코노미스트 전문기자
여론에 밀려 방향 잃지 말아야… ‘인사가 만사’ 명심해야


“한국 경제의 핵심적 과제는 중소기업 진흥과 사회보장입니다. 이 두 가지 과제를 축으로 모든 공약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기 과제와 단기 과제, 재원이 필요한 과제와 그렇지 않은 과제, 국회의 입법을 필요로 하는 과제와 그렇지 않은 과제 이렇게 세 차원으로 나눈 후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남덕우(88) 전 국무총리(산학협동재단 고문)는 “박근혜 정부가 단기적으로 집중할 과제는 민생 회생과 경제 활성화”라고 말했다. 서강학파의 태두로 박정희 정부의 경제팀장격인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남전 총리는 박근혜 정부의 출범을 바라보는 감회가 남다르다고 했다.

“매스미디어와 여론에 너무 이끌리지 말고 임기 말까지 소신대로 공약을 밀고 나갔으면 합니다. 국민의 뜻을 알아야겠지만 여론에 휩쓸려 방향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2012년 12월 24일 오후 그가 고문으로 있는 산학협동재단에서 그와 만났다. 해가 바뀌면 구순을 맞는 이 원로는 여전히 정정했다. 테이블 위에 지필묵이 있기에 박근혜 정부에 주는 휘호를 부탁하자 그는 즉석에서 ‘公明正大(공명정대)’라고 썼다.

박근혜 당선인이 선거과정에서 선점한 경제민주화가 화두입니다.

“경제민주화는 개념이 모호한 이슈입니다. 박 당선인은 민생을 안정시키는 한편 중소기업을 진흥하고 대기업의 시장 지배 및 경제력 남용을 방지하는 것을 경제민주화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만.”

어떻든 선거과정에서 양극화 해소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확인됐습니다. 양극화 대책을 어떻게 세워야 합니까?

“양극화는 대·중소기업간 양극화와 중산층을 붕괴시킨 소득의 양극화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기업 양극화는 중소기업을 획기적으로 육성해 해소해야 합니다. 중소기업이 융성하면 소득의 양극화도 완화되죠. 공정거래법을 엄격히 집행해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영역과 이익을 침범치 못하도록 하고 중소기업이 부품·소재 생산 기술을 적극적으로 개발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확립해야 합니다. 

골목 상권 문제는 기존 대형 마트 안에 영세 상인들이 매장을 낼 수 있도록 지원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대형 마트 인허가 때 아예 인근 영세업자들을 우선적으로 입주시키도록 의무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합니다. 또 중소기업 영역으로 고용계수가 높은 의료, 교육, 관광 등의 서비스 산업을 정부가 적극 육성해야 합니다. 

소득 양극화는 재분배 효과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세구조를 재검토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유럽 국가들에 비해 조세를 통한 재분배 효과가 미미해요. 부동산 거래를 투명화하고 양도차익은 대부분 국고로 흡수토록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박 당선인이 중소기업중앙회를 찾아 “중소기업 대통령이 되겠다”고 밝혔습니다. 중소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의 문제는 뭡니까?

“중소기업 지원은 초점이 분명하고 방법이 철저해야 합니다. 오래 전 대만의 중소기업기술연구센터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입구의 간판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중소기업의 기술문제는 어떤 것이든 반드시 해결해 드립니다.’ 신선한 충격이었죠. 당시 이미 대만 중소기업은 미 항공우주국(NASA)에 부품을 공급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기관이 적지 않습니다만 이런 의지와 자세가 부족해요.”

박 당선인의 복지 청사진은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조세부담률이 낮고 사회보장비가 조세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작습니다. 또 사회복지제도는 구색은 갖췄지만 내용이 부실합니다. 결국 재원을 어떻게 조달하느냐가 문제인데 조세 감면액 축소, 탈세 세원 포착, 예산 세출구조 조정 등을 하더라도 증세가 불가피합니다.”

복지 수요는 급증했는데 재정 건전성은 악화하고 있습니다.

“경기 회복 등을 위해 일시적으로 재정 적자를 내는 것을 보완적 재정정책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적자 재정이 만성화할 가능성입니다. 이에 대한 방지책으로 국회가 불경기 때 적자 재정의 용도와 한도를 정해 주고 호경기 때 부채 상환을 의무화하는 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계부채 1000조 시대입니다. 새 정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가계부채 금리를 더 낮추고 상환기간을 연장하는 수밖에 없어요. 과중한 가계부채는 가정을 파탄시킬뿐더러 소비를 위축시키고 금융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사회문제입니다.”

비정규직 등 일자리 문제도 심각합니다.

“산업구조의 변화와 산업의 수요에 맞춰 인재를 배출하도록 관련 제도를 고쳐야 합니다. 일례로 반값 등록금을 산업 수요가 많은 학과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겁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경제를 성장시켜 투자와 수출, 소비를 늘려야 합니다. 정부 투자는 사회 보장 지출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려 축소될 수밖에 없으니 기업의 투자 환경을 개선해 민간 투자를 촉진해야 합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후 우리나라가 국가 비전을 상실한 듯합니다. 우리나라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선진국 문턱에서 여러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수출이 여전히 버팀목이지만 소수 품목에 집중돼 있고 소재·부품의 대외 의존도가 높아요. 그래서 내수와 고용 유발 효과가 작습니다. 정보기술(IT) 등 첨단산업이 중심 산업이 됐지만 고용 효과가 작아 ‘고용 없는 성장’을 걱정하고 있는 실정이죠. 대한민국의 새 비전으로 저는 ‘성숙한 한국’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안전하고, 기업 하기 좋고, 살기 좋은 나라죠.”

남 전 총리는 박근혜 당선인의 후원회장이다. 10여 년 전 박 당선인이 찾아와 후원회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정치와 거리가 멀어 적임자가 아닌 것 같다고 했는 데도 재삼 부탁을 해 맡았습니다. 그동안 기여한 게 별로 없어 마음에 걸렸는데 이제 마음이 가볍습니다. 국회의원 후원회 자체가 필요 없게 됐으니 말이죠.”

박대통령 시절 지켜본 박 당선인은 어땠습니까?

“청와대에서 이따금 보면 얌전한 처녀 같은 그런 인상이었습니다.”

박 당선인의 리더십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이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엔 산업화와 국방이 과제였죠. 민주화 시대엔 국민의 뜻을 정책에 반영하면서 때로는 국민을 설득하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공약과 정책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중요합니다. 박 당선인은 공약과 그동안의 발언으로 볼 때 통치이념은 건실하다고 봅니다. 다만 ‘인사가 만사’라는 격언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을 골라 써야 합니까?

“기준은 업무 능력과 추진력입니다. 도덕성은 상당히 주관적인 기준입니다. 적재를 골라 적소에 두고 쓰되 풀 가동해야죠. 그래야 능률적인 정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박 당선인에게 국정 운영에 관한 조언을 주시죠. 박 대통령에게서 배울 점은 뭡니까?

“국정 운영은 청와대 비서진이 아니라 국무위원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언론에 어쩌다 대통령이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는 사진이 나가는데, 잘못된 겁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죠. 대통령이 수석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순 있지만 국정에 관한 의견은 장관에게 물어야죠. 장관을 비서처럼 활용하면 됩니다. 

미국의 장관은 아예 직함이 비서(Secretary)예요. 박 대통령은 수시로 장관들 소집해 물어 보고 지시도 하고 그랬습니다. 대통령이 비서진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한다는 인식이 생기면 내각이 위축됩니다. 그때부터 장관이 수석 입을 바라보게 되죠.”

청와대로 불려가면 박 대통령은 애연가인 그에게 담배부터 권했다고 한다. 1970년대 일곱살 연장의 절대 권력자와 맞담배를 피우는 장관. 그는 당시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 때 공언한 인사 원칙이 있다고 했다. “장관은 내가 임명하지만 차관은 장관이 임명하시오.” 차관보 이상 임명할 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는 장관으로 재직한 10년 동안 자신이 고른 사람을 대통령이 비토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박 당선인이 국무총리에게 책임총리에 준하는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했습니다. 책임총리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도입했으면 합니다. 총리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면 대통령이 큰 짐을 덜 수 있죠. 대통령은 외교와 국방만 챙기는 겁니다. 총리는 자신과 팀워크를 이룰 사람을 임명 제청할 수 있어 내각을 이끌기에도 좋죠.”

남 전 총리는 ‘원조’ 서강학파이다. 박 당선인의 경제 멘토로 서강학파의 핵심인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시절 그의 제자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에서 서강학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경제학자들 다수가 서강대에 몸담았습니다. 이들은 이런저런 기회에 경제개발정책에 관한 의견을 개진했고 그게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 띄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저를 시작으로 몇몇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들을 기용했죠. 그러자 언론이 이들을 서강학파라는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현대 경제학의 세례를 받지 않은 국내파(학현학파)와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서강학파는 우리나라에 현대 경제학을 도입하기 위해 다른 미국 유학파 교수들과 함께 경제 교과서를 썼습니다. 서강대는 미국 대학이 하듯이 엄격한 규율을 따르도록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것이 우리나라 대학 교육에 자극제가 됐습니다. 서강학파의 전통은 서강대 출신 후배들이 이어가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