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더 일할 수 있는 ‘퇴직 생태계’ 만들자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늙어가는 나라다. 앞으로 12~13년 후면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복지비용은 늘 것이고, 경제활력은 떨어질 게 뻔하다. 출산률을 높이기도 어렵고 이민 개방도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고령화 사회 예비군’인 정년 퇴직자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하나의 해법이라고 말한다. 퇴직자들이 좀 더 오래 좋은 일자리에서 경륜과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퇴직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지는 그런 시도가 이뤄지고 있는 국내 최고 부자도시 울산을 현지 취재했다. 정년연장 논란과 퇴직자 활용 방안도 짚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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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하려는 의지와 능력 있는 분들이라면 나이에 상관없이 얼마든지 일할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가 제가 꿈꾸는 사회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대선 후보 시절 했던 얘기다. 방점이 일자리에만 찍혀 있는게 아니다. 고령자가 은퇴 이후에도 좋은 일자리에서 일할 수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박 당선인의 생각이다.
그는 “(조기 퇴직으로)소중하게 쌓아온 경험과 기술 경력이 사장되는 것은 가정과 개인의 불행을 넘어 국가적 손실”이라고 말했다. 박 당선인은 정년 규정을 만 60세 이상으로 의무화(법제화)하겠다고 공약했다.
정년 연장만으로 부족
1990년대 이후 ‘정년 연장’은 대통령·국회의원 선거의 단골 공약이었다.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1997년 김대중 국민회의 대선 후보는 “60세까지는 취업을 보장하도록 법을 개정하고 정년을 점진적으로 65세까지 연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지켜지지 않았다. 2002년 노무현 민주당 후보도 정년 연장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시행되지 않았다. 기업에 부담이 된다는 재계의 반발과 정년을 둘러싼 정부부처·정치권·세대 간 갈등 등으로 차일피일 미뤄졌다.
우리나라는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 중 고령화가 가장 빨리 진행되는 나라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2017년 고령화사회에 진입하고, 2026년에는 초고령사회가 된다. 전체 인구 100명 중 20명이 65세 이상이 된다는 얘기다. 더욱이 2017년부터는 생산가능 인구가 감소하고 2021년부터는 노동력 부족현상이 현실화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2010년부터 715만명에 달하는 베이비붐세대의 은퇴가 시작됐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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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는 ‘2012 한국경제보고서’에서 중장년층 고용 확대를 위해 민관 협력을 통한 정년 연장을 권고했다. OECD는 보고서에서 “(한국은) 퇴직자 중 3분의 1이 실업자가 되고 13%는 생산성이 낮은 자영업자가 된다”며 “의무 퇴직연령을 높이되 궁극적으로는 정년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지난해 발간한‘고령자 일자리 현황과 정책과제’ 보고서에도 우리나라의 척박한 정년제 실상이 잘 드러나 있다.
예산처에 따르면, 우리나라 300명 이상 사업장의 평균 정년은 57.3세다. 실제 퇴직 연령은 54.1세였다. 하지만 이들은 이후 14년간 경제활동을 더 한 뒤에 최종적으로 68세에 은퇴했다. 문제는 주된 일자리에서 조기 퇴직한 후 상당수가 질 낮은 일자리나 영세 자영업으로 몰린다는 것이다. 국민연금 혜택을 받는 50대 인구는 약 50%에 불과하다. 또한 55~79세가 공적·개인연금을 받는 액수는 월평균 38만원에 불과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은 OECD 평균 13.5%보다 훨씬 높은 45%다.
정부와 정치권은 해법을 ‘정년 연장 의무화’에서 찾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2012년 12월 말 내놓은 ‘대한민국 중장기 정책과제’ 중에는 “현재 57세에 불과한 평균 정년을 연장해 일할 능력과 의사가 있다면 현재의 일자리에서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있다. 공론화시키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앞서 정부는 10월 16일 김황식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 참석자들은 2015년까지 현재의 정년제를 연장하거나 의무화하는 개선안을 마련키로 했다. 국회에도 관련 법안이 다섯 건 발의 돼 있다. 여야가 본격적인 대선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2012년 7~8월에 집중 발의됐다.
이목희 민주통합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고용상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60세 정년을 의무화하고, 2013~2033년까지 정년을 단계적으로 상향 조정해 64세 이상이 되게 한다는 게 골자다. 정우택 새누리당 의원은 정년을 60세 이상으로 의무화하고 이를 위반한 사업주는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정년 연장 의무화가 능사는 아니다. 핵심은 충분히 일할 수 있고, 일할 의지가 있는 고령 인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맞춰져야 한다. 정부와 정치권이 정년 연장을 의무화(법제화)하려는 이유는 현행법으로는 기업의 정년을 늘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1991년 개정된 ‘고용촉진법’은 정년을 60세로 ‘권고’하고 있다. 강제성이 없다. 기업이 자율적으로 정년을 늘리라는 취지다. 이에 대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이동근 전문위원은 “고용촉진법이 시행된 지 22년이 지나도록 기업들의 자발적인 정년 연장 노력은 미흡했고, 오히려 명예퇴직 등으로 사실상 해고를 유도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정년 연령이 50세 중반을 넘어서지 못해 고령자들의 고용 불안과 빈곤의 위험성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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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은 정년제 자체를 금지하거나, 정년제를 법제화해 정년 연령 이전에 강제 퇴직시키는 것을 막고, 연금수급시기와 연계해 정년제를 허용하는 추세다. 하지만 한국은 정년 연장 60세 의무화가 단기간에 이뤄지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견해도 많다. 현재 정년까지도 근무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정년 연장이 의무화된들 실효성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세대 간 일자리 충돌 논란도 있다. 학계에서는 정년을 연장해도 장기적으로 청년 실업을 심화시키지 않는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하지만, 단순 생산직 업종은 아버지 세대가 자녀 세대 일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재계 반발도 여전하다. 대한상의가 2012년 9월 대기업 300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 응답기업의 77%가 정년 60세 의무화에 대해 “경영에 부담이 된다”고 답했다.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정년 연장을 강제하는 것은 청년 고용과 충돌할 가능성이 크고 임금체계 개편 없이 정년을 늘릴 경우 기업 부담이 늘어 장기적으로는 전체 고용확대에 부정적"이라고 밝혔다.
정년 연장은 오랜 난제다. 정권이 바뀐다고, 밀어붙여서 될 일도 아니다. 정년을 늘려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정년 연장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이 함께 모색돼야 한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일부 부처에서는 마냥 사회적 합의에 맡겨둘 게 아니라 정부가 시기를 정해 법률적으로 강제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펴지만, 기업의 자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점진적으로 정년을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현재 법률상 65세인 고령자 나이 기준 상향, 임금피크제 확대, 임금체계 조정, 고령자 고용연장지원금 확대, 퇴직 전 근로시간 단축청구제 등 완충작용을 할 수 있는 제도를 먼저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정년 연장 의무화가 먼저냐, 정년 후 재고용 확대 방안이 먼저냐는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정년 연장과 관련해 정부나 정치권, 학계, 재계가 되새겨 볼 말이 있다. 인구구조 분야에서 명성이 있는 조지 매그너스 UBS 선임 경제고문이 『고령화 시대의 경제학(원제 : The Age of Aging)』에서 한 말이다.
“사람들이 더 오래 일하고, 경제활동인구의 공급(납세자 수)을 유지하려면 정년이나 연금 수령 개신 연령을 늘리는 조치야말로, 매우 중요한 첫 단계다. 하지만 정년을 늘린다고 바라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정년 연장 조치가 효과가 있도록 하려면, 고령 인구를 더 많이 고용하도록 유인책 같은 노동시장 정책을 다양하게 실행해야 한다.
동시에 55~64세 인구, 더 나아가 55~70세 인구가 계속 일할 수 있게 하려면 연령차별 시정이 우선적인 목표가 돼야 한다. 기업, 정부, 공공부분 고용주들은 근로자를 직장을 다니는 기간 동안 이들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데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정부와 고용주들은 급여 구조를 바꾸고, 나이 많은 근로자들이 연공서열이 아니라 일의 성격에 따라 급여를 받도록 해야 한다.
젊음을 강조하고, 젊음에 호소하는 문화나 나이 든 근로자들은 서둘러 퇴직하고 연금이나 챙기는 문화를 정부, 기업, 노조 등 사회적 동반자들이 힘을 합해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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