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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추석 귀향길을 방불케 할 정도로 교통 정체가 심한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맞은 인터스테이트 95 고속도로. 뉴욕 맨해튼에 있는 한 금융회사의 펀드매니저인 제임스 로저는 남쪽으로 300마일 떨어진 고향 버지니아에 가려고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편도 4차로인 고속도로는 로저처럼 가족을 만나러 고향에 가는 사람들과 연휴에 여행을 떠나는 이들을 태운 자가용과 버스 등으로 북새통이다.
뉴욕을 떠나 뉴저지에 이른 로저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한적한 직선 교외길로 핸들을 돌렸다. 앞에 가는 차량이 없는 걸 재차 확인한 그는 자동차 계기판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차량 양 옆에 접혀있던 날개가 펴지더니 이윽고 로저가 운전하던 자동차는 도로가 아닌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로저가 운전하던 차량은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시판된 최신형 ‘하늘을 나는 자동차(Flying Car)’ 제품이었다.
#2. 제주도로 본사를 옮긴 정보통신 관련 A 회사의 마케팅부서 중견 간부인 김모 부장. 서울에서 중요한 비즈니스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그는 회사 차량을 타고 제주공항으로 향했다. 부서원인 박 과장이 운전하는 차량은 공항 주차장을 지나쳐 활주로로 연결된 게이트를 통과했다. 관제탑과 간단한 교신 후 이 차량은 양 날개를 편 뒤 활주로를 잠시 주행하더니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일반 비행기에 탑승하려면 각종 수속을 밟고 비행기 이륙시간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김 부장과 박 과장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김포공항에 착륙한 이들은 비행기에서 일반 차량으로 갈아탈 필요도 없었다. A 회사의 ‘하늘을 나는 업무용 차량’은 날개를 접은 뒤 활주로에서 시내 도로로 접어든 뒤 서울을 향해 쌩쌩 달리기 시작했다.
공상과학 영화나 애니메이션 이야기가 아니다. 2015년 한국과 미국에서 ‘하늘을 나는 자동차’와 관련해 벌어질 수 있는 장면이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머리 속에서 상상하는 허풍이나 콘셉트 도안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제품으로 현실화됐기 때문이다.
비행기와 자동차를 결합한 제품을 개발한 선두주자는 미국 항공자동차 전문 제조업체 테라푸지아(Terrafugia). 이 회사는 8월 21일 위스콘신주의 한 에어쇼에서 ‘하늘을 나는 자동차’의 공개 비행에 성공했다. 항공자동차가 자체 테스트가 아니라 공개 시험 비행에서 성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분간 수천명의 관객 위에서 하늘을 휘젓고 다는 항공자동차의 이름은 ‘트랜지션(Transition)’. ‘변신’ 또는 ‘개조’라는 뜻을 지닌 신개념의 이 항공 자동차는 제트 비행기와 세단형 자동차를 합친 모양으로 디자인됐다. 트랜지션은 조종석을 포함한 2인용으로 설계됐으며 좌석에는 에어백과 낙하산이 장착돼 있다.
바퀴 4개가 달린 트랜지션의 양 옆에는 도로주행 때 접히는 날개가 달려있다. 자동차일 때 폭 7.54피트(2.29m), 높이 6.5피트(1.99m)인 트랜지션은 운전자 겸 조종사가 버튼을 누르면 두 날개가 전자동으로 펼쳐진다. 양 날개가 완전히 펼쳐지면 트랜지션은 폭 26피트(7.92m) 길이의 경비행기로 변신한다.
버튼 누르면 경비행기로 변신트랜지션은 도로 주행 때 최고시속 70마일(약 112.6km)로 달릴 수 있다. 비행 때 최고항속 115마일(약 185km)로 하늘을 날 수 있다. 콕핏이 있는 조종석에는 자동차 핸들도 달려 있다.
도로주행때 후륜구동 방식으로 운행되는 트랜지션에는 201kg의 짐을 적재할 수 있다. 주요 인터페이스는 터치스크린 방식이다.
35갤런(약 132L) 용량의 연료 탱크는 자동차용으로 디자인됐지만 공중비행 때 항공연료통 역할을 한다. 비행 때 연료 소모량은 시간당 5갤런(약 19L) 정도이며 도로에서는 1갤런으로 35마일(56.3km)을 주행한다.
지난해 3월 첫 테스트 비행에 성공할 당시 트랜지션은 8분간 비행했다. 1년 만에 비행 시간을 두 배 이상으로 끌어올려 공개 시험비행에 성공했다. 트랜지션이 이륙할 때 필요한 활주로의 길이는 일반 비행기의 3분의 1도 안 되는 1700피트(약 520m)에 불과하다.
미국 매사추세츠에 본사가 있는 테라푸지아 회사 홈페이지에는 트랜지션의 특징으로 ‘지상의 도로와 고속도로에서 합법적으로 운전할 수 있고 차고에도 잘 들어간다’ ‘하늘에서 쉽고 재미있게 조종할 수 있다’ ‘자동차와 비행기 사이의 변신이 쉽다’고 소개돼 있다.
2006년부터 항공자동차 개발 작업을 진행한 테라푸지아는 트랜지션의 상용화 시기를 2015년으로 예상한다. 늦어도 2016년 초에는 항공비행기 시장의 첫 상용화 제품으로 판매될 트랜지션의 가격은 대당 27만9000달러(약 3억1000만원)로 책정돼 있다. 미 연방항공청 규정에 따라 트랜지션은 경량 스포츠 항공기(LSA)로 분류되기 때문에 조종사 자격증이 있어야 운행할 수 있다. 조종사 자격증을 받으려면 20시간의 비행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상용화를 앞두고 해결할 과제도 많다. 우선 부품 공급 등 제품과 연관된 것도 있지만 이착륙을 위한 활주로가 필요하다는 항공자동차의 특수한 문제도 있다. 테라푸지아와 트랜지션 구입 예정자들은 한적한 도로에서 마음껏 이착륙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연방항공청에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당국은 안전사고를 우려해 트랜지션이 활주로에서만 이착륙 하도록 내부방침을 세웠다.
테라푸지아는 활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예 트랜지션을 기반으로 수직이착륙용 항공자동차인 ‘TF-X’ 모델의 개발에 나섰다. 이 모델은 헬리콥터처럼 활주로 없이 이륙한 뒤 중간에 쉬지 않고 500마일까지 비행할 수 있다. 또한 트랜지션보다 일반인들이 조종하기에도 더 편리하다. 하지만 이 모델이 상용화되려면 8년~12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미 연방정부는 이착륙 문제 빼고는 테라푸지아의 항공자동차 개발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정부는 트랜지션에 능동형안전장치(ESC) 장착 의무를 한시적으로 면제해줘 차체 무게를 2.7㎏ 줄일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비행하는 데 편리하도록 특수 타이어와 유리를 사용하게 해달라는 테라푸지아의 요청도 승인했다.
수직 이착륙용 모델도 개발 중항공자동차 시장의 앞날은 결국 소비자의 손에 달려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27만9000달러를 선뜻 주고 트랜지션을 구입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현재 200명에 가까운 사람이 트랜지션의 구입 예약을 위해 1인당 1만 달러를 예치했다. 테라푸지아는 향후 에어쇼나 오토쇼 등에서 트랜지션이 일반인들에게 더 자주 소개되고 마케팅이 활발해지면 예약자가 증가할 것으로 기대한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플라이어 1호’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비행에 성공했다. 이어 1908년 헨리 포드가 ‘포드모델T’의 양산으로 자동차 시대를 연 이후 비행기와 자동차가 결합한 제품이 본격적인 생산을 앞두고 있다. 트랜지션이 한 때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아이디어 상품’에 그칠지 아니면 새로운 산업 장르인 ‘항공자동차 업계의 개척자’가 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