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Retirement - 日 가족의 재구성 ‘15분 근거’(近居)

도일 남건욱 2013. 9. 9. 11:20


Retirement - 日 가족의 재구성 ‘15분 근거’(近居)
일본에서 배우는 은퇴의 지혜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특임교수
도보·차량 15분 거리에 2, 3대 모여 살아 … 자녀 양육과 부모 봉양에 도움

일본 요코하마의 고급 주택가 전경. 일본에서는 핵가족화의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해 2, 3세대가 함께 살려는 추세다.


한국 드라마의 인기 주제 중 하나는 ‘가족’이다. 해피 엔딩이든 아니든 가족 갈등과 화해는 단골 소재다. 이른바 ‘막장’도 많지만 ‘화목한 대가족’도 빠지지 않는다. 저녁 밥상에 둘러앉은 장면은 필수다. 조부모·부모·자녀의 3대를 둘러싼 내용 전개는 식상하지만 인기는 꾸준하다. 그런데 실상은 좀 다르다. 대가족은 기억에서조차 찾기 힘들어졌다. 현대사회에서 가족 해체는 일상이 됐다. 

고도 성장과 맞물린 고용환경은 분가·독립을 재촉했고, 가족보다 직장·직업을 먼저 따지게 만들었다. ‘함께’보다 ‘따로’가 합리적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가족 풍경이 그렇다. 이젠 3~4인의 2대 핵가족이 지배적이다. 특히 요즘에는 노인이든 젊은이든 1인 독거 세대도 크게 늘었다. 그러다 보니 전통적인 대가족 사회에선 문제가 되지 않았던 불협화음이 자주 빚어졌다. 부모 봉양과 자녀 양육 문제가 대표적이다.

가족 관계를 둘러싼 ‘전통 vs 현대’의 대결 구도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뿌리는 깊다. 1960년대 이후 고도성장부터다. 생계와 돈을 좇아 도시로 몰리는 인구가 늘면서다. 도시·근대화 조류와 전통 가족관의 충돌이다. 이젠 절정에 달했다. 경쟁 논리가 심화되면서 미끄럼틀 밑으로 추락한 일본 가계가 급증했다. 빈곤 탓에 개인·무연(無緣)화가 일상이 되면서 대가족이 붕괴됐다.

1인 가구와 고독사 급증한 무연사회


3세대 동거를 권장하는 정부 캠페인 포스터.
그렇다면 일본의 가족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두드러진 변화는 무연화다. 집단 고독의 원인이다. 적자생존·승자독식의 경제 논리가 공고했던 일본 사회의 네트워크를 끊어버렸다. ‘무연(無緣)사회’다. 이에 따라 고독사(孤獨死)가 급증했다. 아사·자살 등 충격적인 고독 사망은 연간 3만2000건에 이른다. 

대부분은 고령의 단신 거주자다. 독신일지언정 가족·친척은 있다. 다만 관계가 멀어졌다. 집단·이웃·가족관계를 번거롭게 여겨 자발적으로도 인연을 끊는다. 장기간 연락하지 않는 부모·형제가 흔하다. 사망자의 유골조차 되돌려 받지 않으려고 한다.

이유가 뭘까. 가난이 대표적이다. 돈이 없어 인간관계가 끊긴 것이다. ‘독신=가난’이란 등식의 성립이다. 지금은 노인인구에 한정되지만 연령대는 갈수록 낮아진다. ‘무연 예비군’ ‘노후 난민’ 등의 수식어가 난무한다. 중년을 비롯한 현역 세대도 불안에 떤다. 

시스템과 인식 변화가 없다면 뾰족한 해결책조차 찾기 어렵다. 일본의 가족 붕괴 핵심은 ‘저출산·고령화’다. 적게 낳고 오래 사니 문제가 커졌다. 가족 붕괴는 그 결과다. 인구 변화가 저성장, 경기 침체와 함께 생존 압박을 가중시켰다. 독거(獨居)·만혼(晩婚)·무연의 연쇄 악재 해법은 결국 가족관계의 연대 구축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35’라는 숫자가 의미심장하다. 평생의 단신 생활 여부를 가늠하는 변곡점이 35세다. 그 이상은 만혼으로 사실상 가족 붕괴를 부추긴다. 35세 이상이면 결혼해도 삶은 평탄치 않다. 부모 봉양과 자녀 양육의 딜레마 탓에 본인 노후까지 팍팍해진다. 은퇴 시점이면 3대 비용 요소가 절정에 달한다. 

이른바 ‘트릴레마’로 불리는 악재다. 돈이 없어 만혼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초식남 증가도 마찬가지다 결혼만 하면 희망을 품을 수는 있다. 평균 2.09명의 자녀를 낳는다는 통계가 있다. 결혼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하면 자녀를 두 명 이상 낳는다. 만혼이야말로 장수 사회 트릴레마의 핵심 요소이자 무연사회를 조장하는 불쏘시개다.

이런 가운데 부모가 빠진 조부모와 손자의 관계 회복도 목격된다. 부모야 경제활동에 바쁘니 은퇴 조부모가 어린 손자를 돌보는 형태다. 전통적인 분업관계의 회복이다. 비용 절감을 위해 아예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주의로 회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2010년 ‘화장실의 신(トイレの神樣)’이란 노래가 히트를 쳤다. 

세상을 떠난 할머니에게 어렸을 적 “화장실을 깨끗이 써야 미인이 된다”고 들은 추억담을 떠올리며 할머니를 그리는 가사를 담았다. 가사 속에서는 중요한 내용이 하나 더 있다. 할머니의 손주 양육이다. 가사처럼 조부모가 기른 20대가 많았다는 점이 노래의 히트 배경 가운데 하나다. 지금의 20대라면 엄마가 재취업하면서 할머니에게 맡겨진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1990년대부터 맞벌이 압박이 세졌다. 버블 붕괴 탓이다. 맞벌이가 외벌이를 추월한 것도 이때부터다. 자녀 양육을 조부모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청년세대 중 상당수는 조부모와 친하다. 부모 이상으로 친밀감을 늦기며 친구처럼 지내는 경우가 상당수다. 사회인이 돼도 조부모에게 용돈을 받는 손주그룹이 적잖다. 빠듯한 지갑의 부모보다 연금소득 등으로 비교적 금전 여유가 있는 조부모가 여러모로 낫다. 침체한 경기, 달라진 양육환경이 세대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족관을 낳은 것이다.

새로운 가족 결합의 트렌드도 뚜렷해졌다. 전통적인 대가족으로의 회귀는 아니지만 기대효과는 비슷하게 누리는 변형된 형태의 가족결합이다. 가령 한 지붕 밑에서 살지는 않지만 사실상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동거 효과를 기대하는 식이다. 함께 살며 받는 스트레스는 줄이고 부모 봉양과 자녀 양육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다. 

예를 보자. 일본의 건설회사 광고 중 단골 주제는 복합 세대다. 2~3층에 3세대가 어울려 정겹게 사는 이미지다. 실제 단독주택이 주류인 일본에선 2층짜리 집이 태반이다. 다만 3세대의 동거 가구는 생각보다 적다. 3대가 동일 공간에 어울러 사는 건 힘든 법이다.

그래서 등장한 게 ‘보이지 않는 대가족’으로 불리는 근거(近居)형태다. 동거(同居)는 아니지만 근접 거리에 살며 동거 효과를 누린다. 자녀 양육에 부모 협조가 없으면 힘들어진데다 부모 봉양에도 도움이 된다. 이는 도심의 주거 스타일을 바꿨다. 자녀 결혼·출산 이후 시골에 사는 부모가 도심으로 이사하는 사례가 늘었다. 집을 구할 때 중요한 건 거리다. ‘15분의 법칙’이 나온 이유다. 도보·자동차로 15분 이내에 사는 게 유리하다는 경험이다. 15분은 국물이 식지 않는 시간이다.

통계를 보면 근거 비율은 1997년 28%에서 2006년 41%로 늘었다. 근거 희망자는 30대에서 85%로 증가했다. 지방자치단체에 따라 근거 확대를 위한 비용 지원에 나선 곳도 생겨났다. 비슷한 이유로 결혼 전까지 최대한 부자 부모에 ‘기생’하며 금전 부담을 덜려는 캥거루족도 증가세다. 최근엔 중년까지 가세해 ‘중년 캥거루족’이란 말도 유행이다.

15분은 국물이 식지 않는 시간

가족의 재구성 추세는 ‘한 지붕 여러 가족’의 다소 이상한 동거 형태로까지 연결된다. 고독사를 막고 무연의 네트워크를 해결하려는 고육지책이다. 무연·폐쇄적인 환경을 유연적인 생활공동체로 바꾸려는 노력이다. 셰어 또는 컬렉티브 하우스로 불리는 ‘집합주거’가 그렇다. 

개별 세대(전용면적)와 주민 공유(공용면적)가 각각 존재하는 구조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구성원이 다양해 세대 교류 주택으로도 불린다. 인기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자녀 양육에 도움이 된다. 동거 중인 은퇴 세대가 부모 외출 때 공용면적에서 애들을 봐줄 수 있다. 여성 가구라면 안전이 탁월한 장점이다.

맞벌이 부부는 공용 거실에서의 식사가 우호적이다. 세대를 뛰어 넘는 활발한 교류다. 최근엔 ‘지방 출신 여성 한정’ ‘싱글 마더와 고령자 조합’ 등의 맞춤식 가족 재구성도 인기다. 공동체 기능을 강화할 중대한 실험으로 인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