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과시형 소비 줄어든다

도일 남건욱 2013. 11. 3. 14:00


과시형 소비 줄어든다
淸論濁說
전미영 서울대 연구교수·소비자학


최근 서울 청담동이나 신사동 패션거리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간판 없는 가게’가 부쩍 늘었다는 사실이다. 

간판이 있다 한들 그곳이 식당인지, 커피숍인지, 옷가게인지 도무지 정체를 알기 어렵게 외관 인테리어를 꾸민다. 

메뉴판도 마찬가지다. 이름만 보고서는 주문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체 모를 단어들로 메뉴판이 구성된다. ‘잇츠 매직 램프(It’s magic lamp)’란 메뉴가 커피인지, 아이스크림인지 처음 방문한 사람은 알 수 없다.

이름이 사라지는 현상은 럭셔리 제품군에서도 나타난다. 한 때 한국은 해외 명품 브랜드의 큼지막한 로고에 집착했다.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로고를 자랑하던, 그야말로 ‘3초 백’ 전성시대였다. 하지만 이제 이러한 ‘의도적인 드러냄’은 촌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 로고를 최대한 숨겨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디자이너 브랜드가 인기를 얻고, 이도 아니면 차라리 환경을 생각하는 천가방(에코백)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왜 그럴까? 해답은 소비자의 가치가 요동치고 있다는데 있다. 고급스러움이나 럭셔리함을 앞세워 남들에게 과시하려던 사람들이, 이젠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소비를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남들이 알아봐 주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니 더 이상 유명한 이름도 필요 없게 됐다. 남들이 갖고자 열망하는 제품을 나도 쫓아 구매하려는 집단적 소비행태도 지양한다. 그저 소비하는 그 순간 ‘내가 얼마나 즐거운가’ ‘내가 얼마나 만족하는가’에 에너지가 집중된다. 

이러한 소비행태를 일컬어 ‘컨템포러리(Contemporary) 소비’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동‘ 시대의, 현대의’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이 단어는 소비와 만나 ‘가치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그때 그때의 유행과 시대에 따라 가장 적합한 형태로 변화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덕분에 그 동안 확고했던 브랜드 정체성도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간판 없는 가게들이 이름을 버리는 이유는 어쩌면 식당도, 옷가게도, 카페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식당이면서 옷도 팔고 카페이기도 한 정체불명의 공간이기에 이름 붙이기가 곤란한 것이다. 

유통 조직도 마찬가지다. 고급스러움을 판매하던 백화점에서는 날로 매출이 감소하는 럭셔리 브랜드를 유치하는 대신, 길거리 브랜드와 콜래보레이션한 팝업스토어를 여는데 힘을 쏟는다. 오히려 해외 명품 브랜드들은 저가유통으로 통하던 홈쇼핑에서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다.

럭셔리와 촌스러움, 고가와 저가, 소비와 문화가 한데 뒤섞여 가장 현재적인 가치를 표현할 것을 요구하는 컨템포러리 소비가 확산되면서, 이에 대응해야할 시장에선 고민이 깊다. 럭셔리 브랜드는 로고를 숨기고 고급화를 더욱 강조하는 ‘보이지 않는 잉크(invisible ink)’ 전략을 사용해야할지, 아니면 새로운 고객층을 확보하기 위해 신규라인을 강화해야할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것이다. 반면, 그동안 브랜드 인지도가 약해 힘들었을 개인 사장님들은 이때가 기회다. 

컨템포러리적인 아이디어만 있다면 얼마든지 소비자의 눈길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됐든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성공을 보장했던 과거의 명성은 잠시 잊고 현재의 변화를 직시하는 과감함이 필요하단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