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씨의 글은 톡톡 튀는 맛이 있습니다.
더욱이 고상한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갖기 쉬운 낭만적인 견해가 별로 없는
분이기도 하지요.
조선일보에 꾸준하게 실리는 칼럼에서
“세상에 이런 분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는데 신간에서 몇 대목을 뽑아 보았습니다.
1.
김병만을 스타로 만든 건 개그 프로그램의 ‘달인’이라는
코너였다.
매주 일반인이라면 엄두도 못 낼 미션에 도전해서
감탄과 웃음을 선사했는데 소생이 그 코너에서 본 것은
신자유주의의 노골적인 프로파간다(선전)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기 개발과 도전이야말로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대표적인 덕목이 아니던가.
박수를 보낸 방청객들은 그 불편한 진실을 알고나 환호했는지
모르겠다.
2.
문학은 안 되고 존재감은 인정받고 싶고 그래서 트위더로 정치
글 퐁당퐁당 던지는 이른바 개념 작가들(우리나라 문학의 위기는
독자가 아니라 작가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계신 건지).
지방 돌아다니며 말 같지도 않은 위로를 늘어놓는 감성 팔이
사기꾼들(안 되는 애들에게 안 되는 이유를 말해주는 것이
진짜 도움이 된답니다).
민중사관과 운동사관으로 범벅이 된 역사를 기어이
학생들에게 가르치겠다고 난리인 오만과 편견의 선생님들
(여러분 21세기예요. 세계로 쭉쭉 뻗어나가려는 아이들의 발목을
퇴행적 사관으로 붙잡아두려는 그 심보는 대체 뭔가요).
아직도 폴리스 라인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시위꾼들
(지하철에서 안전선 밖과 같은 의미입니다. 무차별 타격과 심할 경우
총격이 발생할 수도 있는)
3.
86년 늦은 봄날.
여대생 하나가 한강에 몸을 던졌다.
‘전위에 서지도 못하고, 민중을 사랑할 수도, 사랑하는 척 흉내도
낼 수 없어 떠난다’는 유서를 남기고...
존중하고 싶은 80년대의 가장 슬픈 순교자,
일면식도 없지만 그녀에게 지면으로나마 국화 한 송이 올린다.
그렇게 힘들었나요.
그냥, 술이라고 마시면서 조금만 더 견디지 그랬어요.
4.
인간은 절대 자본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진보니 좌파니 하는 사람들은 자꾸만 이 사실을 망각한다.
혹은 모른 척 한다. 평등 사회에 도전했다가 몰락한 공산권을
보고서도 다시 해보면 될 수도 있다고 우긴다.
인간 자체를 개조해보겠다고 나선 끝에 국민 5분의 1을 죽인
크메르루즈를 보고도 딴소리를 한다.
인간은 안 바뀐다. 그래서 인간이다.
5.
가난은 한국인의 DNA다.
유전자는 회귀본능이 있다.
한국 근현대사는 이 가난한 DNA를 유지, 보수하려는 세력
(이게 이른바 ‘깡통 진보’다)과 그것을 끊어내려는 세력의
대립과 싸움이었다. 이 싸움이 역사 교과서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고 있다.
5천년 만에 처음 찾아온 행운이었던 ‘산업화’를
독재와 탄압과 공포와 강압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치겠다고 한다.
6.
가끔 면담을 신청하는 학생들이 있다.
일종의 인생 상담인데 이때 중요한 건 해결해 주는 게 아니라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다. 한 마디 하기는 한다.
나는 아직 인생 상담을 해줄 나이가 되지 않았고
너는 아직 인생 상담을 받을 나이가 되지 않았다고.
그리고 인생에 상담 같은 게 왜 필요하니.
그냥 사는 거지.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면서.
-출처: 남정욱, (불평사회 작별기), 루비박스